문왕과 강태공의 만남은 새역사를 창조했다_견마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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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119.♡.137.16) 작성일13-12-10 14:38 조회7,175회 댓글0건본문
문왕과 강태공의 만남은 새역사를 창조했다
(문왕도수를 이해하기 위한 자료)
[들어가는 말]
상제님은 문공신에게 ‘문왕과 이윤도수’를 붙이셨다. ‘문왕과 이윤도수’에 대한 올바르고 심도있는 이해는 상제님의 천지공사가 어떻게 마무리되는가를 알게 하는 귀중한 정보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한다.
문왕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강태공망(姜太公望) 여상(呂尙)이다. 강씨(姜氏)와 여씨(呂氏)는 그 뿌리가 같다. 강태공을 여상(呂尙)이라고도 하며 둘은 다른 사람이 아닌 한 사람이다. 문왕은 위수 강가에서 곧은 낚시 바늘로 10년 동안 세월을 낚으며 누군가를 기다리던 강태공을 만난다. 문왕은 강태공의 인물됨과 비범함을 즉시 알아보고 그를 스승으로 삼아 나라의 기틀을 다지게 한다. 강태공의 부국강병에 힘입어 주나라는 마침내 상나라(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 천하를 통일하게 된다.
문왕(文王)이 창업의 성군(聖君)이라고 한다면 강태공은 명재상(名宰相)이다. 문왕하면 강태공이 떠오르고, 강태공하면 역시 자연스럽게 문왕이 연결된다. 문왕과 강태공은 한 팀을 이루어 새로운 왕조를 개창했던 성군과 명재상의 대명사다. 문왕은 강태공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그를 발탁했기에 통일천하라는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강태공은 자신의 탁월한 재능을 세상을 위해 발휘하기 위해서는 이를 알아줄 문왕 같은 성군을 만나야 했다. 강태공은 위수 강가에서 곧은 낚시 바늘로 낚시 아닌 낚시를 하며 10년 세월을 기다렸다. 그는 고기잡이를 했던 것이 아니라, 무한한 인내로 세월을 낚으며 결국 자기를 선택해줄 사람을 기다렸던 것이다. 강태공이 낚은 것은 고기도 아니요 세월도 아닌, 문왕이라는 덕 있고 성스런 주군이었던 것이다.
한편 이윤(伊尹)은 누구인가? 이윤은 문왕보다 한 왕조 전(前) 사람으로, 성군(聖君) 성탕(成湯)을 도와 상(商) 왕조를 개창한 또 다른 명재상(名宰相)이다. 주(周)나라를 개창한 문왕에게 강태공이 있었다면, 상(商)나라를 개창한 성탕에게는 명재상 이윤이 있었다. 상제님은 문공신에게 ‘문왕과 이윤도수’를 붙이셨다. 그러니까 성군(聖君)으로는 문왕을 말씀하시고, 명재상(名宰相)으로는 이윤을 말씀하신 것이 된다. 나는 이것을 크로스 언급이라고 표현해보았다. 상제님은 왜 ‘문왕과 이윤도수’라고 말씀하신 것일까? 이미 ‘문왕도수는 부자세습 도수가 아니다’ 라는 글에서 나름대로 밝힌 바 있다.
후천 이라는 새 역사 창업에 있어, 창업자는 문왕과 같이 인재 발탁에 안목과 덕성을 갖추어야 하며, 보필자는 이윤과 같이 기존의 리더가 격이 되지 않는 인물이라고 판단되면 가차없이 버리고 새로운 참된 리더를 찾아나서는 결단력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피력해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으로 ‘문왕과 이윤도수’의 핵심을 10분이 1이나 말한것인지 모르겠다. ‘문왕과 이윤도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에 얽힌 역사적 사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먼저 문왕과 강태공의 만남에 대한 역사적 자료를 살펴보기로 한다.
[역사를 바꾼 문왕과 강태공의 만남]
『가세(家世)』에는 “강태공(姜太公)은 염제 신농씨의 후손으로 주(周)나라 강소(江蘇)의 동쪽 해안지방 사람이며 그의 성(姓)은 강(姜)씨이고 이름은 아(牙)인데 그를 존칭하여 자아(子牙)라고 불렀다.”로 되어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동쪽 해안 지방의 사람이라고 하였으므로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제주(齊州) 출신일 것이며 또 당나라의 사마정(司馬貞)이 『사기(史記)』를 주(註)하여 낸 『색은(索隱)』 이라는 책에도 태공이 염제(炎帝)의 자손이라고 되어있다. 다른 전적(典籍)에는 “중국 정동쪽 산동성 일조시(日照市)에서 출생하였다.”고 되어 있다. 강태공(姜太公)의 내력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설은 모두 강태공이 주(周)나라의 문왕(文王) 무왕(武王)의 스승이 되어 천하를 통일한 것에 있어서는 일치하고 있다.
강태공과 주나라 문왕의 첫 만남은 은(殷 : 상商)나라의 주(紂)가 천자(天子)의 자리에 올라 같은 폭정을 다하고 있을 때였다. 이 주(紂)는 결국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에 의하여 타도되었는데 이 무왕의 아버지인 문왕(文王)이 하루는 사냥을 가려다가 귀갑(龜甲)으로 점(占)을 쳐보니 이번 사냥에는 짐승 대신 훌륭한 인재를 얻을 것이라고 점괘가 나왔다. “그 인재는 장차 임금에 버금가는 위치에 오르거나 제후가 될 사람입니다. 폐하께서는 그 사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는 하늘에서 폐하께 스승을 보내시어 국사를 보좌토록 하신 것이니 이 나라를 3대에 걸쳐 돕게 될 것입니다.” 라는 말을 그때 사관인 편(編)이라는 자가 문왕에게 다가와서 말을 했다. 그리하여 위수의 북쪽으로 사냥을 나간 문왕은 마침 그 곳에서 연일과 다름없이 낚시질을 하고 있는 노인(呂尙 : 71세)을 만났다.
문왕은 첫눈에 그가 비범한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문왕은 강태공에게 가다가 먼저 말을 붙였다. “낚시를 즐기시는가 봅니다.” 드디어 태공과 문왕과의 문답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자 강태공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떤 일을 할 때 군자는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즐기지만 소인배는 일의 결과에 어떤 이익이 생기는 것만을 좋아합니다. 제가 지금 낚시를 하고 있는 것도 그와 비슷한 데 저는 지금 고기를 낚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왕이 다시 물었다. “지금 낚시질을 하고 있는 것이 무엇과 비슷하다는 것인지 좀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소.” 여상이 다시 대답했다. “낚시에는 세 가지 심오한 이치가 숨어있습니다. 첫째는 미끼로써 고리를 낚는 것인데 이는 녹(祿)을 주어 인재를 취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두 번째는 좋은 먹이라야 더욱 큰 고기를 낚을 수 있는 법인데 인재에게 녹을 많이 주면 줄수록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충성스런 신하가 나오는 이치와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물고기는 크기에 따라 요리법이 다르듯이 인재의 성품과 됨됨이에 따라 벼슬을 달리 맡기는 이치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서 여상은 낚시질이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닌 일 같지만 이처럼 심오한 이치가 들어있기 때문에 낚시하는 자체로 천하를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의 뜻이 깊으면 물고기 따위는 안중에 두지 않고 더욱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문왕은 그 말에 감탄하여 다시 물었다. “그 낚시 비법에 숨은 이치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오.” 여상이 대답했다. “샘의 근원이 깊을수록 물은 쉼 없이 흐르는 법이고 물이 쉼 없이 흘러내리는 곳에는 항상 물고기가 사는 법입니다. 또한 뿌리가 깊은 나무는 튼튼하게 자라고 튼튼한 나무에 좋은 열매가 열리는 법입니다. 이는 자연의 이치이지만 군주와 신하의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군주와 신하가 서로 뜻이 같으면 서로 존중하며 깊은 정으로서 일을 도모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와 천하의 큰일을 도모할 수 있은데 이 또한 올바른 이치입니다.
여상의 말이 끝나자 문왕은 일어나 그에게 경의의 뜻으로 두 번 절을 한 뒤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하늘의 이치라 할 수 있겠군요. 그대는 하늘에서 내게 내려준 분이니 어찌 하늘의 명을 거역하겠소이까.” 이상의 경우와 같이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은 급소를 찌르는 물음에 급소를 말하는 현문현답(賢問賢答)이었다. 문왕은 기뻤다. 그는 “우리 조상 태공(太公 : 문왕의 아버지 기棄를 가르킴) 때부터 성인이 주(周)를 찾을 것이며 이로 인하여 주나라는 크게 일어난다고 하는 예언이 있었소. 당신이 바로 그분이요. 우리 태공께서 참으로 당신을 대망(大望)하여 그렇듯 기다렸는데 지금 태공(太公)이 살아계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하고 말했다고 하여 태공망(太公望)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문왕은 강태공을 수레에 태워 궁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강태공은 문왕의 스승이 되었고, BC1135년(강태공 76세)에 문왕의 태사(太師)와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자리(현 국무총리)를 겸하게 하였다. 강태공은 좋은 정책을 아뢰어 주(周)나라가 은(殷)나라를 3분의 2까지 잠식해 들어갔으며, 은의 제후(諸侯)들이 주나라 따르게 하고, 풍읍(酆邑)에 도읍을 건설하여 천하를 호령하는 지세를 차지하게 하였다. 그러나 문왕은 그 뜻을 펴보지 못하고 전쟁 중에 죽고 아들 희발(姬發)이 왕위를 계승하여 무왕(武王)에 올랐으며 강태공을 상부(尙父)와 태사(太師)로 모시었다.
이 무렵부터 전해 내려오는 『육도삼략(六韜三略)』 이란 책이 있다. 육도(六韜)는 주나라의 강태공망(姜太公望)이 지은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으며 강태공과 문왕, 무왕의 일문일답(一問一答)을 엮은 것이라고도 하며 병서(兵書)이면서 치세(治世)의 대도(大道)로부터 인간학, 조직학에 논급하고 정전(政戰) 및 인륜(人倫)을 논(論)한 것이 특색이다. 이 책은 중국의 모든 병법의 시초라고도 한다. 육도라 이름한 것은 그 속에 문도(文韜), 무도(武韜), 용도(龍韜), 호도(虎韜), 표도(豹韜), 견도(犬韜)의 여섯 권이 있기 때문이다.
삼략(三略)은 진(秦)나라 시대의 황석공(黃石公)이라는 은군자(隱君子 : 명예를 구하지 않는 군자)가 이고(圯稿)라는 곳에서 장량(張良)에게 전해준 태공망의 병서라 전해온다. 이 책을 삼략이라고 한 것은 이 책 중에 상략(上略) 중략(中略) 하략(下略) 의 세 권 의 책이 있으므로 이름하게 된 것이다. 또 략(略)은 책략(策略), 모략(謀略)의 뜻이다.
주(周) 무왕(武王)은 즉위한 년에 은나라를 칠 사전 공작으로서의 맹진회맹(孟津會盟 : 黃河邊上의 孟津)를 통하여 시위를 하였는데 이는 제후중의 얼마만한 숫자가 실제로 무왕과 뭉치겠다는가를 시험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주 무왕 3년(강태공 89세)에 강태공을 주축으로 용사 3000명, 갑사(甲士) 45000명, 융거(戎車) 300대와 800제후들의 지원 하에 목야(牧野)에서 주신군(紂辛軍) 70만을 궤멸시키고 조가(朝歌)를 함락하니 폭군 주신(紂辛)은 등록대(登鹿臺)로 달아나 스스로 몸에 불을 질러 죽고 은(殷) 왕조는 멸망하였다.
대승을 거둔 무왕은 이튿날 아침 몸소 사단(社壇)에 나아가 하늘에 보고하는 제사를 드리었다. 그리고는 백성의 피를 빨아 긁어모았단 은나라의 보화와 곡식을 모조리 내어다가 백성에게 내림으로써 다시 한 번 백성의 갈채를 받았다. 이어서 무왕은 공신들을 공(公) 후(候) 백(伯) 자(子) 남(男)의 다섯 등급의 작위(爵位)로 나누어 영토를 분배하여 제후(諸侯)로 봉(封)함으로써 비로소 봉건제도(封建制度)를 실시하였다. 그 때 공(公) 후(候)는 사방 100리, 백(伯)은 사방 70리, 자(子) 남(男)은 사방 50리의 땅을 받았다고 한다. 강태공도 BC 1122년 천하통일 및 주천자국(周天子國) 개국 1등공신으로 제(齊) 땅 사방 100리를 받고 제왕(齊王)으로 수봉(首封)되었다. 도읍지는 영구(營丘)로 정했다.
그후 태공은 정치를 개선하고 풍속을 존중하며 예법을 간소화 하는 등 백성들을 위하여 올바른 정치를 펴 나가고 어업 외에 제염업 등 상공업을 진작하고 수산을 장려함으로써 상공업의 발달로 제나라를 부강하게 하였다.
무왕의 다음인 성왕(成王)때에 무왕의 제(弟)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의 반란이 있었다. 성왕은 사자를 보내어 태공에게 동쪽은 해안선까지 서쪽은 황하, 남쪽은 삼릉, 북쪽은 무체에 이르기까지의 그 안에 있는 제후를 임의로 정벌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하였다. 이로써 태공은 천자에 속하는 선전(宣戰) 강화의 대권의 3분의 1을 위임받은 것이다. 그 후 봉토가 점점 확대되어 처음 받았던 100리가 5천리가 되어 그 후손인 환공(桓公)이 뒷날 밝은 정치를 펴 제후들을 통수 하게 되기까지의 길을 트게 한 것이다.
강태공이 지휘한 상(商) 나라를 멸하는 저명한 목야(牧野) 대전과 강태공의 병법(兵法) 모두 중국에서 제일 빠른 사례이고 병서(兵書)이다. 이것 때문에 강태공은 중국의 군사(軍事) 시조(始祖)로 칭할 수 있다. 당(唐) 송(宋) 전에는 강태공을 역대 황제들이 무성(武聖)으로 봉하였고, 당(唐) 숙종(肅宗)은 강태공을 무성왕(武聖王)으로 봉하였으며, 원조(元朝) 시대부터 민간에서는 강태공을 신화전설로 발전하였고, 명대(明代) 만력(萬曆) 연간에서 허중림(許仲琳)이 봉신연의(封神演義) 소설을 창조해서부터 강태공은 사람으로부터 신선 인물로 변했으며 민간에서 강태공을 신봉(信奉)하기 시작했다.
강태공망(姜太公望)의 묘는 섬서성 함양시 주능향(周能鄕) 문왕릉(文王陵) 우(右)편에 있고 의관총(衣冠冢)은 고향 영구(營丘)에 있으며 사당(祠堂)도 같은 곳에 있다.
[매듭짓는 말]
문왕은 강태공과 같은 비범한 인물을 알아보고 그를 스승이며 재상으로 등용했기에 상나라(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다. 이른바 문왕도수란 무엇인가? 인재를 알아보고, 인재를 발탁하고, 인재를 대접하고, 인재를 바로 쓰는 자가 대업을 성취한다는 교훈이 아닐까 한다. 일꾼(인재)를 소모품 취급하고, 일꾼을 수단으로 취급하는 자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리더는 솔선수범을 해야 하지만,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할 필요는 없다. 일이란 분담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일꾼들이 스스로의 창의력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여건을 구비해 주어야 한다. 말은 쉽지만 사실상 고도의 덕성과 안목이 필요하다고 본다.
상제님의 천지공사 기록에는 강태공에 대한 많은 말씀이 나온다. 그 주된 내용은 조직학이며, 인사학이며 인재를 쓰는 요체들이다. 이를 전체적으로 관통해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혼자 잘난척 하며 자기밖에 모르는 리더, 부하직원을 믿지 못하고 질투나 하는 리더, 일꾼을 소모품이나 수단으로 취급하는 리더는 결국 인재를 떠나가게 하고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어간다. 나는 그러한 리더를 겪어본 적이 있다. 그도 여러 번 상제님 말씀을 읽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헛된 천자의식, 자기 우월의식에 빠져 충성하려고 찾아온 일꾼들을 하시(下視)하고, 무시(無視)하고, 노예시(奴隸視)해서 내어 쫓는 것을 보았다. 결국 많은 일꾼들이 그의 곁을 떠나갔다. 다음은 강태공에 대한 상제님의 말씀을 약간 모아본 것이다.
* 상제님께서 옛사람을 평론하실 때는 매양 강태공, 석가모니, 관운장, 이마두를 칭찬하시니라. (道典 8:62)
* 신농씨(神農氏)가 농사짓는 법과 의술로 천하 만세를 윤택하게 하였고, 태공(太公)이 병법과 정치로써 천하 만세에 은혜를 주었나니 이제 하늘과 땅이 성공하는 가을철을 당하여 천지의 모든 신명들이 그들을 높이 받드느니라. (道典 2:29)
* 신농씨가 온갖 풀을 맛보아 의약을 짓고 농사짓는 법과 백곡을 정함으로써 천하가 그 은택(恩澤)을 입어 왔으나 그 공덕을 앙모하여 보답하지 않고 간혹 의원가에 ‘신농유업(神農遺業)’이라 써 붙일 뿐이며 강태공이 제잔금폭(除殘禁暴)의 묘략과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술법을 전수함으로부터 천하가 그 덕으로 대업을 이루었으되 그 은덕을 보답지 않고 다만 디딜방아에 동티막이로 ‘경신년 모월 모일 강태공 조작(姜太公造作)’이라 써 붙일 뿐이니 어찌 도의(道義)에 합당하리오. 또한 강태공이 십 년 경영으로 삼천육백 개의 낚시를 벌였음이 어찌 한갓 주(周)나라를 일으켜 봉작(封爵)을 얻기 위함이었으랴. 이를 널리 후세에 전하려 하였음이니라. 이제 해원시대를 당하여 모든 신명이 신농씨와 태공의 은혜에 보답하게 되리라. (道典 4:145)
*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문왕(文王)은 유리(?里)에서 384효(爻)를 해석하였고 태공(太公)은 위수(渭水)에서 3,600개의 낚시를 벌였는데 문왕의 도술은 먼저 나타났거니와 태공의 도술은 이 때에 나오느니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니 이러하니라. (道典 6:9)
* 夫主將之法은 務攬英雄之心하고
부주장지법 무람영웅지심
賞祿有功하고 通志于衆이라
상록유공 통지우중
故로 與衆同好靡不成이요 與衆同惡靡不傾이니
고 여중동호미불성 여중동오미불경
治國安家는 得人也요 亡國破家는 失人也라
치국안가 득인야 망국파가 실인야
含氣之類는 咸願得其志니라
함기지류 함원득기지
무릇 주장(主將)의 일하는 법은
영웅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힘쓰고
공 있는 자는 상과 녹을 주고
뭇 사람과 한마음으로 뜻을 통하는 데 있느니라.
그러므로 여러 사람과 좋아하는 것을 함께 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고
여러 사람과 미워하는 것을 함께 하면
기울어지지 않는 것이 없나니
나라를 잘 다스리고 집안을 평안케 함은 사람을 얻는 데 달려 있고
나라가 망하고 집안을 망침은 사람을 잃는 데 있느니라.
생명을 가진 만물은 모두 그 뜻을 이루기 원하느니라.
이어 말씀하시기를 “이 글은 장수(將帥)가 될 자의 대감(大鑑)이니라.” 하시니라.
--삼략(三略) 상략(上略)에 있는 글
(道典 8:60)
* 구릿골에 계실 때 하루는 형렬에게 옛글을 외워 주시며 “이 글을 잘 기억하라.” 하시니 이러하니라.
夫用兵之要는 在崇禮而重祿하니
부용병지요 재숭례이중록
禮崇則義士至하고 祿重則志士輕死니라
예숭즉의사지 녹중즉지사경사
故로 祿賢에 不愛財하고 賞功에 不踰時하면
고 녹현 불애재 상공 불유시
則士卒竝하여 敵國削이니라
즉사졸병 적국삭
무릇 용병의 요체는
예를 숭상하고 녹을 중히 여김에 있나니
예를 숭상하면 의로운 일꾼이 들어오고
녹을 중히 여기면 뜻 있는 일꾼은 죽음을 가볍게 여기느니라.
그러므로 현자(賢者)에게 녹을 주되 재물을 아끼지 않고
공 있는 자에게 상을 줌에 때를 넘기지 않으면
큰 일꾼과 작은 일꾼이 다 함께 적을 무찌르느니라.
이어 말씀하시기를 “사람을 쓸 때에는 남녀의 구별이 없나니, 옛날에 진평(陳平)은 ‘야출동문(夜出東門) 여자 이천인(女子二千人)’ 하였느니라.” 하시고
“대장부가 여자 대장부니라.” 하시니라.
----삼략(三略) 상략(上略)에 있는 글
(道典 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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