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미륵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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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방천화극 (118.♡.43.165) 작성일15-02-08 23:17 조회6,212회 댓글0건본문
한국 미륵신앙의 전개과정
고구려는 현세적 성격이 강했던 중국 북위불교와 비슷한 미륵신앙을 보이고 있어서, 미륵과 아미타 신앙(서방정토 신앙)이 혼동된 신앙형태였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 역사적 사료는 단편적이다.
신라 미륵 신앙의 특성은 미륵을 신봉하고 도를 구하면, 그 몸이 그대로 미륵불이 된다는 미륵 성불 사상과, 미륵이 화랑으로 출현한다는 것이다. 이는 미륵이 인간계의 이상에 응하여 현실화한다는 미륵의 "인격적 구현"을 이상으로 삼는 것이다. 이 역시 하생 신앙이지만, 신라의 하생 신앙은 정치적, 종교적 통제 목적에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백제 불교는 계율주의적 경향에서 미륵신앙을 발전시켰다. 백제 미륵신앙의 특징은 현실국토를 미륵국토화하려는 "국토적 구현"을 특징으로 하는 하생 신앙을 보여준다. 이것이 이 땅에 미륵불의 용화세계를 실현하려는 신앙이다.
통일신라시대의 미륵신앙은 백제땅의 미륵신앙 전통을 계승하여, 그것을 토대로 신라의 미륵신앙을 가미하여 인격적인 구현을 위한 실천운동을 전개한 특징을 가진다.
고려 왕조는 왕권강화의 방편으로 민중과 직접적인 조우를 꾀했고, 따라서 대승보살계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즉, 왕은 보살이고, 백성은 일반 신도라는 王卽佛 사상이 그것이다. 그러나, 고려 중기 사회적 혼란의 시기에 민중은 말법사상과 일치된 하생신앙에 이끌려 미륵의 출현을 고대했다. 한편, 주술의존성이 강했던 고려 불교의 미륵신앙은 민간신앙으로서의 국면을 전개하여, 득남, 금기, 기복, 치병, 수호 등 무속과의 습합현상을 보였다.
조선 개창 세력은 유교적 지배질서 확립을 위해 불교를 억압해서, 중기 이후에는 불교의 공인된 종파가 거의 소멸되었다. 그러나 억불정책은 오히려 미륵신앙과 민중의 관계를 더욱 밀착시켰다. 조선시대 미륵신앙은 불교의 민간화를 심화시켜 현세이익적 성향을 강화했다. 조선후기 사회적 혼란기에 미륵하생에 대한 갈망이 확산되었지만, 아직 사회개혁의 주도적 역할을 할 민중의식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구한말, 사회적 혼란기에, 현실에 무력한 기존종교는 민중으로부터 괴리되고, 내,외적 위기 상황에서 민중의 종교적 기대는 팽창했다. 이에 호응하여 일어난 신흥종교들은 그 교리적 근거에 있어 대부분 미륵신앙을 표방했거나, 그 영향을 받았다.
증산계의 경우, 증산은 "나는 미륵불이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 미륵불을 보라" 라고 하여, 당래불인 미륵으로 자신을 표명하고, 천지공사도 이상적 불국토인 용화세계의 건설과정으로 표방했다. 그는 천지공사를 했던 용화동을 미륵불의 會上인 龍幻場이라고 했으며, 묘사했던 선경의 모습도 미륵 경전들에 나오는 용화회상과 흡사하다. 유병덕은 이러한 증산교파의 미륵하생신앙은 첫째, 미륵으로 나타날 인물을 찾으려는 태도, 둘째, 미륵의 의지를 실현할 수 잇는 선택된 땅을 찾으려는 것, 셋재, 미륵 하생의 시기를 정하고 기다리는 태도, 넷째, 미륵이 하생하기 위해서 극도의 위기를 맞게 된다는 태도, 넷째, 대망의지로 현실을 부정하며 요행을 찾는 태도의 특성을 가졌다고 분석했다.
원불교는 미륵신앙을 재해석했다. 유병덕에 따르면 원불교 미륵하생신앙의 특징은 첫째, 法身佛(이를 一圓相으로 상징함)을 믿게 함으로써, 전통불교의 實大乘佛敎와 일치시키려고 했고, 둘째, 一圓相 진리를 스스로 터득해서 깨쳐야 스스로 우주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며, 셋째, 미륵불은 객관적으로 따로 모셔지는 대상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며, 넷째, 누구나 모두 깨치면 상호 미륵불로 존숭된다는 것이며, 다섯째, 서로가 서로의 존재근거가 되고 있음을 아는 지혜선명이 서로를 비쳐주는 세계가 용화회상이라는 해석 등이다.
이 외에도 구한말 대두된 종교들 대부분은 미륵신앙의 말세인식, 구세주 기대, 이상세계 실현이라는 사상을 내포했고, 이것이 사회변혁의 기대와 실천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구한말 미륵신앙의 역사적 의의는 민중화된 미륵신앙이 사회변혁의 이념 체계로서 일익을 담당하였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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