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성의 _천지개벽경_의 개요와 문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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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우신조 (110.♡.51.114) 작성일15-08-24 20:06 조회6,712회 댓글2건본문
이중성의 『천지개벽경』
1) 이중성李重盛의 생애와 신앙배경
① 20대 초반의 독립운동가
이중성은 20세의 젊은 나이에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활동하던 사람이었다. 1897년생이니 그의 나이 20세면 보천교가 24방주(1916년) 조직을 이미 가동했고 60방주(1919년) 조직으로 확대개편 하면서 폭발적인 성장을 하던 때다. 그 때 그는 독립운동에 몰두해 있었다. 그러므로 독립운동 자금의 원천이었던 보천교에 대해서 그가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가 보천교에 입교했을 때는 이미 차경석 성도가 소위 ‘무진설법’으로 믿음의 대상을 변경하여 순수한 상제님 신앙에서 이탈해 있던 때다. 주된 이유는 차경석 성도가 무진년(1928년)에 이르러 아내 이씨로부터 ‘영안을 통하여 보니 상제님의 자리에 삼황오제신이 들어서고 상제님께서 풀대님에 삿갓을 쓰고 보좌를 떠나시더라.’는 말과 ‘삼황오제신은 곧 경석의 아버지 차치구’라는 말을 듣고 혹하여 차치구를 신앙 대상으로 받들고 교리도 유교식으로 바꾸었던 것이다.(『도전』 6:90:3 각주) 후일 보천교가 거의 망하게 되자 차경석 성도는 당시 보천교 신도들에게 “그대들은 나한테 속았고, 나는 강증산에게 속았다.”는 말을 할 정도로까지 낙담하였다. 무진년 당시의 이런 보천교 분위기에 이중성은 아마 혼란스러웠을 거다. 그런 그가 어떻게 해서 『천지개벽경』을 쓰게 되었는가. 먼저 그의 생애부터 살펴보자.
이중성은 1897년 4월 29일(음력) 경상도 동래군 기장면 동부리에서 부친 이치삼과 李致三과 모친 밀양 박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의 본관은 합천(陜川) 이씨였는데 후일 자신에게 종통을 끌어 붙이기 위해 전주 이씨가 아닌 ‘원성(遠姓)의 이씨’라는 말로 조작하게 된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뛰어나고 총명하여 고향 마을에서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또 일본어를 무척 잘 하였는데 14세에 면장面長의 통역을 할 정도였으며, 그 일본인 면장의 추천으로 역시 일본인이었던 경남도지사의 통역까지 지냈다.
18세 되던 1914년 10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한 적도 있으며 20세인 1916년부터는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주 임무는 독립운동에 소요되는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었다.바로 이 때문에 그는 자연스럽게 보천교와 접촉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보천교는 당시 독립운동 자금의 상당부분을 부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치하였기 때문에 비밀리에 할 수 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헌성자의 명단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 독립운동에서 차지하는 보천교의 역할이 현재 역사적으로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 진실마저 사라질 수는 없다.
② 보천교의 입교와 탈퇴
이중성은 충격을 금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힘써 노력했지만 시세의 흐름으로 보아 일본 제국주의의 위세는 날로 더해가고 조선의 독립은 요원해 보였다. 그러나 보천교의 교리로 표현된 상제님의 진리 속에 이미 모든 것이 다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조선의 독립뿐만 아니라 조선이 일본으로 넘어가게 된 역사적 과정까지도 이미 다 증산상제님의 도, 즉 증산도의 진리 속에 다 들어있지 않은가. 그의 충격은 증산도의 진리 속에 조선과 일본의 문제뿐만 아니라 전 세계 국가와 우주자연 모두를 주관하고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진리가 들어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컷다. 이중성이 말로만 듣던 상제님의 진리를 보천교를 통하여 상세하게 접하게 된 것은 1928년(무진년) 봄 이후로 보인다. 왜냐하면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던 그가 다시 국내에 잠입한 것은 1928년 봄이기 때문이다. 이 때 그는 보천교와 교섭을 하여 6개월 후에 처음으로 차경석 성도를 만나게 된다. 차경석 성도는 이중성의 능력을 인정하여 보천교의 외무를 주관하는 수호사장修好司長을 맡기기도 했으나 이때는 이미 차경석 성도의 무진설법(1928년 음력 정월 3일) 이후였다.
이중성이 1928년 보천교에 입교는 했지만 오래 머물지는 않은 것 같다. 엄청난 진리적 충격을 받고 상제님의 진리를 좀 더 깊이 체득하여 신앙하려고 본업이던 조선의 독립운동까지 뒤로 미루고 보천교에 입교했지만 보천교는 이미 자신이 알고 있던 보천교가 아니었다. 그가 입교하던 바로 그 해 정월 3일 날 보천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고 있었다. 상제님 신앙은 뒷전이고 유교의 삼황오제신을 차경석 성도의 아버지인 차치구라 하며, 간부들의 명칭마저 유교식으로 변경하였다. 보천교 내에서도 이에 반대하는 신도들은 ‘보천교 구파’로 독립해 나갔다. 남은 신도들은 ‘보천교 신파’라 했다. 이제 보천교는 신구파로 갈라진 것이다. 신앙의 대상이 달랐으니 당연히 갈라진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이중성은 조용히 보천교를 물러나왔다. 그 이후 그가 다시 보천교에 들어간 기록은 없다.
이제 이중성은 자신의 갈 길을 결정해야 했다. 엄청난 진리적 충격으로 인한 신앙의 초발심은 남아있어 다시 독립운동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그 자신이 이미 상제님 진리로 인하여 변했기 때문에 다시 예전의 그로 돌아갈 수 는 없었다. 그는 보천교 본소가 있던 대흥리 앞 비룡촌에 거처를 정하고 수도생활에 들어갔다. 그리고 상제님을 말씀 수집에 나선 것이다. 처음부터 그가 상제님의 말씀을 수집하여 경전으로 편찬한다는 생각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뚜렷한 증거가 없다. 왜냐하면 1946년 현재 전해지고 있는 『천지개벽경』의 서문을 쓰기는 썼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자신의 생전에 책을 출판을 보지 못하고 1958년 11월에 눈을 감게 된다.
③ 신앙생활과 사회생활
이중성의 수도생활은 철저하였다. 특히 태을주 수행에 관한 그의 태도는 확고하였다. 태을주 수행에 관한 한 그는 그 자신에게만 엄격했던 것이 아니라 자식들에게 까지도 엄격하였다. 그의 딸인 이옥수 여사의 증언에 의하면 “태을주를 하루에 3천 독씩 염주를 돌리면서 안 읽으면 굶겼으며, 자신이 태을주를 읽다가 깜빡 잠이라도 들면 깨어나서 ‘나 자는 사이에 나보다 더 읽은 사람이 있으면 어쩌나!’ 하고 땅을 쳤다.”고 한다.(『도전』, 11:384 측주) 수행을 하지 않으면 자식들에게 밥을 주지 않을 정도이며, 행여 자신이 무슨 일이 있어 태을주 수행을 못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면 누가 자기보다 먼저 도통할까봐 그 놓친 시간을 무척 아깝게 생각했을 정도였으니 대단하다 할 것이다. 그는 그만큼 태을주 수행에 관한 욕심이 많았다. 신앙 초기의 이런 초발심이 원동력이 되어 상제님 말씀 수집도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변질되고 만다.
이중성은 당시 사회적으로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인물이 얼마나 출중했던지 항간에는 후일 이승만 정권하에서 1-2대 국회의원과 상공부 장관, 중앙대 총장을 지낸 임영신任永信(1899-1977) 씨와 애인관계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임영신 씨가 생애의 끝까지 독신을 고집한 것을 보면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겠다. 후일 임영신 씨는 이중성의 자녀를 서울로 불러 공부시켜 준다고 연락을 할 정도였다. (이중성의 딸 이옥수 여사 증언)
2) 『천지개벽경』의 공과功過
① 『천지개벽경』의 저술 동기와 당시의 시대상황
이중성이 보천교에 입교한 바로 다음 해(1929년)에 『『대순전경』』이 출간되었다. 다른 모든 성도들과 신도들도 그랬겠지만 이중성으로서는 이 때 최초로 비교적 체계적인 상제님을 말씀을 접했다. 물론 이중성이『증산천사공사기』를 보았을 가능성도 상당히 있으나 그 책은 『대순전경』만큼은 못했을 것이다.
이중성이 보천교에 입교했을 당시에 보천교는 전환기에 처해있었다. 무진(1928)년 (음력) 정월 3일에 차경석 성도는 상제님 신앙에서 이탈하여 보천교를 유교식으로 변경하였고, 다음해인 기사(1929)년 (음력) 3월 15일 거행 예정이었던 정읍에 새로 지은 보천교의 성전聖殿인 십일전十一殿의 봉안식마저 정읍경찰서장에 의해서 두 번씩이나 연기당했다가 결국 하지 못했다. 경찰서장이 말하는 불허 이유가 “보천교 탈퇴자가 이 기회를 이용하여 행동을 개시하니, 만약 그 날에 거행하면 큰 싸움이 날 것이요...”라 했으니 그 당시 보천교의 내분이 심각하여 탈퇴자가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가 있다. 이중성도 그 탈퇴자들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중성이 보천교에 입교했을 때는 이미 보천교가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을 때였다. 상제님께서 수석성도인 김형렬 성도에게 하신 “정읍이 대창大昌하되 잠농지운蠶農之運이라. 누에는 집만 지으면 죽나니 집만 끝이 나면 죽으리라.”는 말씀 그대로 정읍에서 크게 부흥했던 차경석 성도의 보천교의 운명이 보천교의 집인 십일전의 완공을 기점으로 쇠퇴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보천교 쇠퇴의 가장 큰 이유는 상제님을 미든 신앙에서 이탈한 것이다. 이후 보천교는 예전의 세력을 다시는 만회하지 못하고 병자(1936)년에 차경석 성도가 사망함으로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만다.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보천교를 탈퇴한 이중성은 정읍 비룡촌飛龍村에 거처를 정하게 된다. 이중성이 보천교를 탈퇴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보천교에서 남긴 역사자료인 『보천교연혁사(상),(하)』에서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박문기 씨의 수집자료에 의하면 “이중성이 주장한 것은 민족자결이었고 교주(차경석 성도)가 주장한 것은 (일본과의) 대동단결이었다.”는 것이다. 이중성은 독립운동가였으니 당연히 조선의 자주독립을 원했을 것이다. 조선 사람의 합쳐진 힘으로 조선의 독립을 회복하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러나 차경석 성도는 상제님의 천지공사에 100% 다 참여치는 못했으나 상제님의 천지공사의 세계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이 모든 시대상황이 다 상제님의 천지공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의 과정임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차경석 성도는 상제님께서 하신 “내가 이제 조선의 국운을 거두어 잠시 일본에 맡기려 하노니...”(『도전』 5:125:2)라는 말씀을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천지공사의 후반기인 비교적 늦은 정미(1907)년에 입도했기 때문에 직접 듣지 못했다면 동료 성도들로부터 전해 들었을 것이다. 상제님의 천지공사가 그렇게 되어있었던 것이다. 상제님께서 조선을 일본에 잠시 맡기셨기 때문에 차경석 성도의 입장에서는 일본과의 대동단결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② 『천지개벽경』의 특성
이중성은 이제 직접 자신이 상제님의 말씀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이상호의 『대순전경』을 보고 자극도 받았을 것이다. 이중성은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했을 정도였으니 당시에 이미 신학문을 접했었고 구학문을 한 이상호보다는 저술에 자신도 있었을 것이다. 그 방법이야 어떠했던지 간에 이중성은 열심히 상제님의 말씀을 수집했다. 그래서 자신이 쓴 『천지개벽경』에 있는 내용의 약 34%가 『대순전경』에는 전혀 없는 내용이다. 물론 그 34%가 다 상제님 말씀이라고는 절대로 단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중성은 자신의 책과 『대순전경』과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려고 상당히 노력하였음은 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대순전경』이 이미 출판되어 나왔으므로 그의 책은 『대순전경』과는 다른 뭔가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쓴 책의 서술방식도 『대순전경』과는 완전히 다른 편년체로 바꾸어 버렸다. 그 결과가 긍적적인지 부정적인지는 별도의 문제이고 그는 자신의 책과 『대순전경』과의 차별화를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종국적으로 문체文體 마저도 구어체口語體식 순한문純漢文으로 다 바꾸어버려 상제님의 원래 말씀을 완전히 변색시켜 버렸다. 상제님의 본래 말씀을 한문으로 번역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1946년 (음력) 4월 27일 자신이 저술한 『천지개벽경』의 서문을 쓰게 된다. 이때는 벌써 김형렬 성도를 위시하여 차경석 성도, 박공우 성도, 김갑칠 성도, 김병욱 성도, 이치복 성도 등 주요 성도들은 다 작고하고 없었으므로 더 이상 상제님의 말씀 수집이 힘들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상제님 대학교 도수의 주인공인 김경학 성도도 그 이듬해인 1947년 작고한다.
그러나 이중성은 자신이 살아있을 동안 자신의 저술인 『천지개벽경』을 출판하지는 못한다. 왜 그랬을까? 아직도 수집할 말씀 내용이 더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
③ 『천지개벽경』의 문제점 분석
이중성의 『천지개벽경』은 그가 사망한 지 34년이 지난 1992년에야 비로소 후손들에 의해 출판된다. 1946년 4월에 이중성은 『천지개벽경』의 저술이 완료되었음을 상징하는 책의 서문序文을 쓰고 1958년에 사망한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상호는 8년 뒤인 1966년에 사망한다. 다시 말하면 이중성이 『천지개벽경』 저술을 마쳤을 때 『대순전경』의 저자인 이상호는 살아있었다는 얘기다. 『천지개벽경』 내용의 66%가 『대순전경』의 내용과 중복되거나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으니 이중성은 이것이 두려웠던 것일까?
그는 자신의 저서 서문에서 정필정론正筆正論을 얘기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이치에 맞지 않으면 상제님의 말씀이 아니요, 그 행위가 이치에 맞지 않으면 상제님의 행위가 아니다.”라고 집필원칙을 세웠으나 정작 그 자신이 집필한 저서는 정필정론이 되지 못하였다. 그의 책이 정필정론이 되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 상제님의 성언聖言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초기의 순수했던 신앙의 열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변질되어버린 것이다. 즉, 자신을 상제님이 정해놓으신 상제님의 후천대업을 이룩하는 주인공으로 착각한 것이다. 이것이 『천지개벽경』의 첫 번째 문제점이자 가장 큰 문제점이다.
그리고 이 문제점으로부터 『천지개벽경』의 또 다른 모든 문제점이 불거져 나온다. 결국 그는 이상호와 똑같은 오류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는 상제님께서 정해놓으신 진주도수眞主度數에 대해서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알지도 못했다. 초기의 이중성은 얼마나 순수했던가. 그는 조국의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이다. 그 순수함으로 상제님 신앙에 뛰어들어 저술까지 완성했다. 그런데 그도 어쩔 수 없이 변질되어 버렸다. 상제님의 호호탕탕한 진리의 세계를 성훈 말씀 수집을 통해 알게 되면서 자신이 진리의 주인공이 되고픈 욕심이 발동한 것이다.
이중성의 도욕道慾은 대단했다. 상제님께서 박공우 성도에게 의통인패를 전해주신 것을 그는 기존의 기록을 통해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직접 상제님 성언聖言을 수집하면서 박공우 성도를 만나게 되자 그의 딸을 박공우 성도의 아들에게 시집보낼 정도로 도욕이 발동했다. 자신과 박공우 성도와는 21살의 차이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돈간이 된 것이다. 그런 연유로 『천지개벽경』에는 상제님의 성도 중 박공우 성도와 차경석 성도의 이름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 수석성도였던 김형렬 성도의 등장횟수는 박공우 성도의 3분의 1밖에 안 된다. 비슷한 횟수로 등장한 차경석 성도는 오직 차경석 성도를 비난하기 위해서 등장시킨 것으로 생각될 정도로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중성이 차경석 성도와 의견을 달리해서 보천교를 탈퇴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이중성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차경석 성도를 비난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상제님의 말씀에까지 손을 댔다. 자신의 말을 상제님의 말처럼 꾸민 것이다. 순수한 신앙심이 변질하여 『천지개벽경』 저술 목적과 결론이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로서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 이외에는 딴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도 이상호와 같이 돌아올 수 없는 길로 간 것이다.
그는 깊이 생각했다. 자신이 상제님의 후계자가 되어 종통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상제님을 후천의 당요唐堯로 만들어 버리고 이중성 자신은 후천의 우순虞舜이 되는 것이었다. 그것도 상제님의 말씀으로서 그렇게 된 것으로 왜곡한 것이다. 당요가 우순에게 자신의 나라를 전해줬지만 그의 혈통은 아니었던 것처럼 자신이 상제님의 혈통은 아니지만 상제님의 종통을 전수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그의 상제님 말씀 왜곡은 이러했다. “후천의 대권은 덕 있는 사람에게서 덕 있는 사람에게로 전수된다.” 그가 만약 강姜씨였다면 이런 식으로 왜곡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식으로 왜곡했을 것이다. 그는 상제님과 성이 달랐기 때문에 요순의 선양 고사를 끌어와 이렇게 왜곡한 것이다. 그렇게 해야 자신에게 상제님의 종통宗統이 돌아올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상징하는 ‘원성遠姓의 이씨李氏’를 비결秘訣 속에 끌어넣는다.
『천지개벽경』의 두 번째 문제점은 당시 항간에 퍼져있던 비결들을 끌어 들여 상제님 말씀으로 왜곡시킨 것이다. 이것 또한 상제님께서 정해놓으신 진수도수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제님은 후천을 건설하시는 조화주 하느님이시지 비결해설가는 아니다. 그런데 이중성은 상제님을 완전히 비결해설가로 만들어 버렸다. 그것도 문답식 구성을 통해서 제자가 물으면 상제님께서 대답하시는 식으로 꾸며놓은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오히려 당시의 비결을 부정하셨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당시 유행하던 ‘계룡산 정씨鄭氏 왕국’에 관한 것이었다. 상제님께서는 정씨 왕국뿐만 아니라 가야산의 조씨趙氏 왕국과 칠산의 범씨范氏 왕국까지도 “그림자를 나타내지 못하리라.”(『도전』 3:184:17)고 하셨다. 조선말 당시에 정씨 왕국이 건설된다는 비결이 성행하자 상제님께서는 아예 계룡산 정씨 왕국의 기운을 거두시는 공사(『도전』 4:70)와 정씨 기운을 꺾는 공사(『도전』 5:239)까지 보셨다. 이처럼 상제님께서는 비결을 부정하셨지만 이중성은 자신의 책 속에 상제님을 가탁하여 비결을 50개나 끌어다 넣었다. 이 50개의 비결 중 오직 『천지개벽경』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50%나 차지한다. 과연 상제님께서 이 많은 비결을 다 말씀하셨을까? 그런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상제님 당신이 비결을 부정하셨으므로. 그리고 『천지개벽경』에 수록된 상제님 말씀으로 주장되어지는 이 비결을 이중성에게 증언한 성도뿐만 아니라 일반 증언자의 이름은 단 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이 비결의 주인공으로 원성의 이씨를 등장시킨다. 전주 이씨가 아닌 원성의 이씨인 것이다. 자신이 합천陜川 이씨이므로 원성의 이씨는 이중성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 셋째 이중성은 상제님을 ‘대선생大先生’으로 호칭하면서 상제님을 진짜 세속의 서당선생으로 만들어 버렸다. 제자들은 묻고 선생님은 답변하는 식으로 구성한 것이다. 소위 논어의 문답식 구성을 한 것이다.
▶ 넷째 이중성은 자신의 저서인 『천지개벽경』을 『대순전경』에 비해 너무 차별화 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다 보니 『대순전경』과 똑같은 성구임에도 불구하고 『대순전경』에는 등장하는 성도의 이름이 『천지개벽경』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중성은 아예 공사에 참여한 성도의 이름을 빼버린 것이다. 그것도 고의적으로 빼버린 것이다. 그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순전경』에 기술된 것과 똑같이 기록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공사의 시간대마저 바꾼 경우도 있다. 『천지개벽경』의 서술방식이 편년체이므로 정확한 시간대가 생명이다. 그런데 『대순전경』과 같은 내용의 『천지개벽경』 성구 23.5%가 다른 시간대에 배치되어 있다. 『천지개벽경』이 『대순전경』보다 나중에 저술되었으면 『대순전경』의 잘못된 부분을 교정하고 보다 진보된 모습을 보여야 되는데 그렇지 못했다. 편년체의 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된 모습만 보인다. 공사의 시간대 이동과 공사 참여 성도의 이름을 고의적으로 빼버린 것 등이다. 이 역시 『대순전경』처럼 직접 공사의 현장을 발로 답사하지 않고 그저 증언자의 말만 수집한 결과이며, 『대순전경』의 기록을 그대로 옮겼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다.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중성은 결국 후천의 우순虞舜이 되지 못하고 1958년 사망한다.
1) 이중성李重盛의 생애와 신앙배경
① 20대 초반의 독립운동가
이중성은 20세의 젊은 나이에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활동하던 사람이었다. 1897년생이니 그의 나이 20세면 보천교가 24방주(1916년) 조직을 이미 가동했고 60방주(1919년) 조직으로 확대개편 하면서 폭발적인 성장을 하던 때다. 그 때 그는 독립운동에 몰두해 있었다. 그러므로 독립운동 자금의 원천이었던 보천교에 대해서 그가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가 보천교에 입교했을 때는 이미 차경석 성도가 소위 ‘무진설법’으로 믿음의 대상을 변경하여 순수한 상제님 신앙에서 이탈해 있던 때다. 주된 이유는 차경석 성도가 무진년(1928년)에 이르러 아내 이씨로부터 ‘영안을 통하여 보니 상제님의 자리에 삼황오제신이 들어서고 상제님께서 풀대님에 삿갓을 쓰고 보좌를 떠나시더라.’는 말과 ‘삼황오제신은 곧 경석의 아버지 차치구’라는 말을 듣고 혹하여 차치구를 신앙 대상으로 받들고 교리도 유교식으로 바꾸었던 것이다.(『도전』 6:90:3 각주) 후일 보천교가 거의 망하게 되자 차경석 성도는 당시 보천교 신도들에게 “그대들은 나한테 속았고, 나는 강증산에게 속았다.”는 말을 할 정도로까지 낙담하였다. 무진년 당시의 이런 보천교 분위기에 이중성은 아마 혼란스러웠을 거다. 그런 그가 어떻게 해서 『천지개벽경』을 쓰게 되었는가. 먼저 그의 생애부터 살펴보자.
이중성은 1897년 4월 29일(음력) 경상도 동래군 기장면 동부리에서 부친 이치삼과 李致三과 모친 밀양 박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의 본관은 합천(陜川) 이씨였는데 후일 자신에게 종통을 끌어 붙이기 위해 전주 이씨가 아닌 ‘원성(遠姓)의 이씨’라는 말로 조작하게 된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뛰어나고 총명하여 고향 마을에서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또 일본어를 무척 잘 하였는데 14세에 면장面長의 통역을 할 정도였으며, 그 일본인 면장의 추천으로 역시 일본인이었던 경남도지사의 통역까지 지냈다.
18세 되던 1914년 10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한 적도 있으며 20세인 1916년부터는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주 임무는 독립운동에 소요되는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었다.바로 이 때문에 그는 자연스럽게 보천교와 접촉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보천교는 당시 독립운동 자금의 상당부분을 부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치하였기 때문에 비밀리에 할 수 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헌성자의 명단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 독립운동에서 차지하는 보천교의 역할이 현재 역사적으로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 진실마저 사라질 수는 없다.
② 보천교의 입교와 탈퇴
이중성은 충격을 금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힘써 노력했지만 시세의 흐름으로 보아 일본 제국주의의 위세는 날로 더해가고 조선의 독립은 요원해 보였다. 그러나 보천교의 교리로 표현된 상제님의 진리 속에 이미 모든 것이 다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조선의 독립뿐만 아니라 조선이 일본으로 넘어가게 된 역사적 과정까지도 이미 다 증산상제님의 도, 즉 증산도의 진리 속에 다 들어있지 않은가. 그의 충격은 증산도의 진리 속에 조선과 일본의 문제뿐만 아니라 전 세계 국가와 우주자연 모두를 주관하고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진리가 들어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컷다. 이중성이 말로만 듣던 상제님의 진리를 보천교를 통하여 상세하게 접하게 된 것은 1928년(무진년) 봄 이후로 보인다. 왜냐하면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던 그가 다시 국내에 잠입한 것은 1928년 봄이기 때문이다. 이 때 그는 보천교와 교섭을 하여 6개월 후에 처음으로 차경석 성도를 만나게 된다. 차경석 성도는 이중성의 능력을 인정하여 보천교의 외무를 주관하는 수호사장修好司長을 맡기기도 했으나 이때는 이미 차경석 성도의 무진설법(1928년 음력 정월 3일) 이후였다.
이중성이 1928년 보천교에 입교는 했지만 오래 머물지는 않은 것 같다. 엄청난 진리적 충격을 받고 상제님의 진리를 좀 더 깊이 체득하여 신앙하려고 본업이던 조선의 독립운동까지 뒤로 미루고 보천교에 입교했지만 보천교는 이미 자신이 알고 있던 보천교가 아니었다. 그가 입교하던 바로 그 해 정월 3일 날 보천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고 있었다. 상제님 신앙은 뒷전이고 유교의 삼황오제신을 차경석 성도의 아버지인 차치구라 하며, 간부들의 명칭마저 유교식으로 변경하였다. 보천교 내에서도 이에 반대하는 신도들은 ‘보천교 구파’로 독립해 나갔다. 남은 신도들은 ‘보천교 신파’라 했다. 이제 보천교는 신구파로 갈라진 것이다. 신앙의 대상이 달랐으니 당연히 갈라진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이중성은 조용히 보천교를 물러나왔다. 그 이후 그가 다시 보천교에 들어간 기록은 없다.
이제 이중성은 자신의 갈 길을 결정해야 했다. 엄청난 진리적 충격으로 인한 신앙의 초발심은 남아있어 다시 독립운동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그 자신이 이미 상제님 진리로 인하여 변했기 때문에 다시 예전의 그로 돌아갈 수 는 없었다. 그는 보천교 본소가 있던 대흥리 앞 비룡촌에 거처를 정하고 수도생활에 들어갔다. 그리고 상제님을 말씀 수집에 나선 것이다. 처음부터 그가 상제님의 말씀을 수집하여 경전으로 편찬한다는 생각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뚜렷한 증거가 없다. 왜냐하면 1946년 현재 전해지고 있는 『천지개벽경』의 서문을 쓰기는 썼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자신의 생전에 책을 출판을 보지 못하고 1958년 11월에 눈을 감게 된다.
③ 신앙생활과 사회생활
이중성의 수도생활은 철저하였다. 특히 태을주 수행에 관한 그의 태도는 확고하였다. 태을주 수행에 관한 한 그는 그 자신에게만 엄격했던 것이 아니라 자식들에게 까지도 엄격하였다. 그의 딸인 이옥수 여사의 증언에 의하면 “태을주를 하루에 3천 독씩 염주를 돌리면서 안 읽으면 굶겼으며, 자신이 태을주를 읽다가 깜빡 잠이라도 들면 깨어나서 ‘나 자는 사이에 나보다 더 읽은 사람이 있으면 어쩌나!’ 하고 땅을 쳤다.”고 한다.(『도전』, 11:384 측주) 수행을 하지 않으면 자식들에게 밥을 주지 않을 정도이며, 행여 자신이 무슨 일이 있어 태을주 수행을 못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면 누가 자기보다 먼저 도통할까봐 그 놓친 시간을 무척 아깝게 생각했을 정도였으니 대단하다 할 것이다. 그는 그만큼 태을주 수행에 관한 욕심이 많았다. 신앙 초기의 이런 초발심이 원동력이 되어 상제님 말씀 수집도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변질되고 만다.
이중성은 당시 사회적으로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인물이 얼마나 출중했던지 항간에는 후일 이승만 정권하에서 1-2대 국회의원과 상공부 장관, 중앙대 총장을 지낸 임영신任永信(1899-1977) 씨와 애인관계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임영신 씨가 생애의 끝까지 독신을 고집한 것을 보면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겠다. 후일 임영신 씨는 이중성의 자녀를 서울로 불러 공부시켜 준다고 연락을 할 정도였다. (이중성의 딸 이옥수 여사 증언)
2) 『천지개벽경』의 공과功過
① 『천지개벽경』의 저술 동기와 당시의 시대상황
이중성이 보천교에 입교한 바로 다음 해(1929년)에 『『대순전경』』이 출간되었다. 다른 모든 성도들과 신도들도 그랬겠지만 이중성으로서는 이 때 최초로 비교적 체계적인 상제님을 말씀을 접했다. 물론 이중성이『증산천사공사기』를 보았을 가능성도 상당히 있으나 그 책은 『대순전경』만큼은 못했을 것이다.
이중성이 보천교에 입교했을 당시에 보천교는 전환기에 처해있었다. 무진(1928)년 (음력) 정월 3일에 차경석 성도는 상제님 신앙에서 이탈하여 보천교를 유교식으로 변경하였고, 다음해인 기사(1929)년 (음력) 3월 15일 거행 예정이었던 정읍에 새로 지은 보천교의 성전聖殿인 십일전十一殿의 봉안식마저 정읍경찰서장에 의해서 두 번씩이나 연기당했다가 결국 하지 못했다. 경찰서장이 말하는 불허 이유가 “보천교 탈퇴자가 이 기회를 이용하여 행동을 개시하니, 만약 그 날에 거행하면 큰 싸움이 날 것이요...”라 했으니 그 당시 보천교의 내분이 심각하여 탈퇴자가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가 있다. 이중성도 그 탈퇴자들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중성이 보천교에 입교했을 때는 이미 보천교가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을 때였다. 상제님께서 수석성도인 김형렬 성도에게 하신 “정읍이 대창大昌하되 잠농지운蠶農之運이라. 누에는 집만 지으면 죽나니 집만 끝이 나면 죽으리라.”는 말씀 그대로 정읍에서 크게 부흥했던 차경석 성도의 보천교의 운명이 보천교의 집인 십일전의 완공을 기점으로 쇠퇴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보천교 쇠퇴의 가장 큰 이유는 상제님을 미든 신앙에서 이탈한 것이다. 이후 보천교는 예전의 세력을 다시는 만회하지 못하고 병자(1936)년에 차경석 성도가 사망함으로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만다.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보천교를 탈퇴한 이중성은 정읍 비룡촌飛龍村에 거처를 정하게 된다. 이중성이 보천교를 탈퇴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보천교에서 남긴 역사자료인 『보천교연혁사(상),(하)』에서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박문기 씨의 수집자료에 의하면 “이중성이 주장한 것은 민족자결이었고 교주(차경석 성도)가 주장한 것은 (일본과의) 대동단결이었다.”는 것이다. 이중성은 독립운동가였으니 당연히 조선의 자주독립을 원했을 것이다. 조선 사람의 합쳐진 힘으로 조선의 독립을 회복하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러나 차경석 성도는 상제님의 천지공사에 100% 다 참여치는 못했으나 상제님의 천지공사의 세계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이 모든 시대상황이 다 상제님의 천지공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의 과정임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차경석 성도는 상제님께서 하신 “내가 이제 조선의 국운을 거두어 잠시 일본에 맡기려 하노니...”(『도전』 5:125:2)라는 말씀을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천지공사의 후반기인 비교적 늦은 정미(1907)년에 입도했기 때문에 직접 듣지 못했다면 동료 성도들로부터 전해 들었을 것이다. 상제님의 천지공사가 그렇게 되어있었던 것이다. 상제님께서 조선을 일본에 잠시 맡기셨기 때문에 차경석 성도의 입장에서는 일본과의 대동단결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② 『천지개벽경』의 특성
이중성은 이제 직접 자신이 상제님의 말씀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이상호의 『대순전경』을 보고 자극도 받았을 것이다. 이중성은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했을 정도였으니 당시에 이미 신학문을 접했었고 구학문을 한 이상호보다는 저술에 자신도 있었을 것이다. 그 방법이야 어떠했던지 간에 이중성은 열심히 상제님의 말씀을 수집했다. 그래서 자신이 쓴 『천지개벽경』에 있는 내용의 약 34%가 『대순전경』에는 전혀 없는 내용이다. 물론 그 34%가 다 상제님 말씀이라고는 절대로 단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중성은 자신의 책과 『대순전경』과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려고 상당히 노력하였음은 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대순전경』이 이미 출판되어 나왔으므로 그의 책은 『대순전경』과는 다른 뭔가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쓴 책의 서술방식도 『대순전경』과는 완전히 다른 편년체로 바꾸어 버렸다. 그 결과가 긍적적인지 부정적인지는 별도의 문제이고 그는 자신의 책과 『대순전경』과의 차별화를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종국적으로 문체文體 마저도 구어체口語體식 순한문純漢文으로 다 바꾸어버려 상제님의 원래 말씀을 완전히 변색시켜 버렸다. 상제님의 본래 말씀을 한문으로 번역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1946년 (음력) 4월 27일 자신이 저술한 『천지개벽경』의 서문을 쓰게 된다. 이때는 벌써 김형렬 성도를 위시하여 차경석 성도, 박공우 성도, 김갑칠 성도, 김병욱 성도, 이치복 성도 등 주요 성도들은 다 작고하고 없었으므로 더 이상 상제님의 말씀 수집이 힘들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상제님 대학교 도수의 주인공인 김경학 성도도 그 이듬해인 1947년 작고한다.
그러나 이중성은 자신이 살아있을 동안 자신의 저술인 『천지개벽경』을 출판하지는 못한다. 왜 그랬을까? 아직도 수집할 말씀 내용이 더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
③ 『천지개벽경』의 문제점 분석
이중성의 『천지개벽경』은 그가 사망한 지 34년이 지난 1992년에야 비로소 후손들에 의해 출판된다. 1946년 4월에 이중성은 『천지개벽경』의 저술이 완료되었음을 상징하는 책의 서문序文을 쓰고 1958년에 사망한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상호는 8년 뒤인 1966년에 사망한다. 다시 말하면 이중성이 『천지개벽경』 저술을 마쳤을 때 『대순전경』의 저자인 이상호는 살아있었다는 얘기다. 『천지개벽경』 내용의 66%가 『대순전경』의 내용과 중복되거나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으니 이중성은 이것이 두려웠던 것일까?
그는 자신의 저서 서문에서 정필정론正筆正論을 얘기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이치에 맞지 않으면 상제님의 말씀이 아니요, 그 행위가 이치에 맞지 않으면 상제님의 행위가 아니다.”라고 집필원칙을 세웠으나 정작 그 자신이 집필한 저서는 정필정론이 되지 못하였다. 그의 책이 정필정론이 되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 상제님의 성언聖言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초기의 순수했던 신앙의 열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변질되어버린 것이다. 즉, 자신을 상제님이 정해놓으신 상제님의 후천대업을 이룩하는 주인공으로 착각한 것이다. 이것이 『천지개벽경』의 첫 번째 문제점이자 가장 큰 문제점이다.
그리고 이 문제점으로부터 『천지개벽경』의 또 다른 모든 문제점이 불거져 나온다. 결국 그는 이상호와 똑같은 오류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는 상제님께서 정해놓으신 진주도수眞主度數에 대해서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알지도 못했다. 초기의 이중성은 얼마나 순수했던가. 그는 조국의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이다. 그 순수함으로 상제님 신앙에 뛰어들어 저술까지 완성했다. 그런데 그도 어쩔 수 없이 변질되어 버렸다. 상제님의 호호탕탕한 진리의 세계를 성훈 말씀 수집을 통해 알게 되면서 자신이 진리의 주인공이 되고픈 욕심이 발동한 것이다.
이중성의 도욕道慾은 대단했다. 상제님께서 박공우 성도에게 의통인패를 전해주신 것을 그는 기존의 기록을 통해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직접 상제님 성언聖言을 수집하면서 박공우 성도를 만나게 되자 그의 딸을 박공우 성도의 아들에게 시집보낼 정도로 도욕이 발동했다. 자신과 박공우 성도와는 21살의 차이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돈간이 된 것이다. 그런 연유로 『천지개벽경』에는 상제님의 성도 중 박공우 성도와 차경석 성도의 이름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 수석성도였던 김형렬 성도의 등장횟수는 박공우 성도의 3분의 1밖에 안 된다. 비슷한 횟수로 등장한 차경석 성도는 오직 차경석 성도를 비난하기 위해서 등장시킨 것으로 생각될 정도로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중성이 차경석 성도와 의견을 달리해서 보천교를 탈퇴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이중성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차경석 성도를 비난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상제님의 말씀에까지 손을 댔다. 자신의 말을 상제님의 말처럼 꾸민 것이다. 순수한 신앙심이 변질하여 『천지개벽경』 저술 목적과 결론이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로서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 이외에는 딴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도 이상호와 같이 돌아올 수 없는 길로 간 것이다.
그는 깊이 생각했다. 자신이 상제님의 후계자가 되어 종통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상제님을 후천의 당요唐堯로 만들어 버리고 이중성 자신은 후천의 우순虞舜이 되는 것이었다. 그것도 상제님의 말씀으로서 그렇게 된 것으로 왜곡한 것이다. 당요가 우순에게 자신의 나라를 전해줬지만 그의 혈통은 아니었던 것처럼 자신이 상제님의 혈통은 아니지만 상제님의 종통을 전수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그의 상제님 말씀 왜곡은 이러했다. “후천의 대권은 덕 있는 사람에게서 덕 있는 사람에게로 전수된다.” 그가 만약 강姜씨였다면 이런 식으로 왜곡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식으로 왜곡했을 것이다. 그는 상제님과 성이 달랐기 때문에 요순의 선양 고사를 끌어와 이렇게 왜곡한 것이다. 그렇게 해야 자신에게 상제님의 종통宗統이 돌아올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상징하는 ‘원성遠姓의 이씨李氏’를 비결秘訣 속에 끌어넣는다.
『천지개벽경』의 두 번째 문제점은 당시 항간에 퍼져있던 비결들을 끌어 들여 상제님 말씀으로 왜곡시킨 것이다. 이것 또한 상제님께서 정해놓으신 진수도수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제님은 후천을 건설하시는 조화주 하느님이시지 비결해설가는 아니다. 그런데 이중성은 상제님을 완전히 비결해설가로 만들어 버렸다. 그것도 문답식 구성을 통해서 제자가 물으면 상제님께서 대답하시는 식으로 꾸며놓은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오히려 당시의 비결을 부정하셨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당시 유행하던 ‘계룡산 정씨鄭氏 왕국’에 관한 것이었다. 상제님께서는 정씨 왕국뿐만 아니라 가야산의 조씨趙氏 왕국과 칠산의 범씨范氏 왕국까지도 “그림자를 나타내지 못하리라.”(『도전』 3:184:17)고 하셨다. 조선말 당시에 정씨 왕국이 건설된다는 비결이 성행하자 상제님께서는 아예 계룡산 정씨 왕국의 기운을 거두시는 공사(『도전』 4:70)와 정씨 기운을 꺾는 공사(『도전』 5:239)까지 보셨다. 이처럼 상제님께서는 비결을 부정하셨지만 이중성은 자신의 책 속에 상제님을 가탁하여 비결을 50개나 끌어다 넣었다. 이 50개의 비결 중 오직 『천지개벽경』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50%나 차지한다. 과연 상제님께서 이 많은 비결을 다 말씀하셨을까? 그런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상제님 당신이 비결을 부정하셨으므로. 그리고 『천지개벽경』에 수록된 상제님 말씀으로 주장되어지는 이 비결을 이중성에게 증언한 성도뿐만 아니라 일반 증언자의 이름은 단 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이 비결의 주인공으로 원성의 이씨를 등장시킨다. 전주 이씨가 아닌 원성의 이씨인 것이다. 자신이 합천陜川 이씨이므로 원성의 이씨는 이중성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 셋째 이중성은 상제님을 ‘대선생大先生’으로 호칭하면서 상제님을 진짜 세속의 서당선생으로 만들어 버렸다. 제자들은 묻고 선생님은 답변하는 식으로 구성한 것이다. 소위 논어의 문답식 구성을 한 것이다.
▶ 넷째 이중성은 자신의 저서인 『천지개벽경』을 『대순전경』에 비해 너무 차별화 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다 보니 『대순전경』과 똑같은 성구임에도 불구하고 『대순전경』에는 등장하는 성도의 이름이 『천지개벽경』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중성은 아예 공사에 참여한 성도의 이름을 빼버린 것이다. 그것도 고의적으로 빼버린 것이다. 그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순전경』에 기술된 것과 똑같이 기록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공사의 시간대마저 바꾼 경우도 있다. 『천지개벽경』의 서술방식이 편년체이므로 정확한 시간대가 생명이다. 그런데 『대순전경』과 같은 내용의 『천지개벽경』 성구 23.5%가 다른 시간대에 배치되어 있다. 『천지개벽경』이 『대순전경』보다 나중에 저술되었으면 『대순전경』의 잘못된 부분을 교정하고 보다 진보된 모습을 보여야 되는데 그렇지 못했다. 편년체의 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된 모습만 보인다. 공사의 시간대 이동과 공사 참여 성도의 이름을 고의적으로 빼버린 것 등이다. 이 역시 『대순전경』처럼 직접 공사의 현장을 발로 답사하지 않고 그저 증언자의 말만 수집한 결과이며, 『대순전경』의 기록을 그대로 옮겼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다.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중성은 결국 후천의 우순虞舜이 되지 못하고 1958년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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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정적님의 댓글
정적 아이피 76.♡.164.2 작성일
님의 글입니까?
아님 다른곳의 글 옮긴것입니까?
맑은바람밝은달님의 댓글
맑은바람밝은달 아이피 211.♡.159.28 작성일
천우신조님이 쓰신글이 아니고 안산교 사람이 쓴글을 퍼온 글로 보입니다. 안산교 입장에서는 혈통부자세습 왕후장상 천자 황제 옹호하는 것이니 저런 흐름으로 썼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려서 읽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아무튼 좋은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