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예산을 다녀왔습니다_신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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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3-12-09 18:23 조회6,158회 댓글0건본문
12년 전 2001년 10월 25일에 있었던 일
참신앙 소속 참일꾼 몇 명은 오늘 예산을 다녀왔습니다. 한 분을 만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분은 돌아가신 홍범초 선생님과 30년 넘게 교분을 가지고 증산교를 함께 신앙했으며, 지금까지 그곳 예산에서 살아오신 분입니다. 만나 뵈니 진솔하시고, 욕심이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젊은 우리 참일꾼들을 꺼릴것 없이 만나주시고 과거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30살 나이에 홍교수님과 직장과 신앙관계로 인연을 맺어 그곳 예산으로 가서 생활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증산교를 신앙해 오신 분이셨습니다. 홍교수님을 도와서 월간 천지공사 발행을 비롯 많은 일들을 성심성의껏 도우신 분으로서 어쩌면 홍교수님 혈육의 형제분보다도 더 가까운 분이셨다고 합니다. 같은 종교를 신앙하게 되면 그런 지기지우들을 만나게 되는가 봅니다. 오늘 만나 대화한 내용가운데 12년전 10월 25일에 있었던 일들을 다시 구성하여 보았습니다.
문) 예산에 살면서 같은 교당에 다니시고, 홍교수님과 아주 가까운 사이로서 함께 도와서 증산교를 세상에 알리는 월간천지공사 발행 등에 관여 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벌써 12년전 일인데, 당일에 겪었던 일을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답) 홍교수님이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미 세 개의 작은 사건이 있습니다. 88년에 범증산교사가 출간되고 나서 모교단 소속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분들은 범증산교사에서 왜 자기 교단과 교주님에 대한 과거 얘기를 그렇게 썼는가 항의하러 왔다고 합니다. 홍교수님은 학자의 입장에서 사실대로 썼다고 말하니까 그들은 격분해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것이 모 교단 사람들과 첫 번째 일이었다고 했습니다.
범증산교사 책이 나온지 4~5년 뒤에 일인 것 같습니다. 서울에 올라가셨을 때 홍교수님을 포함 3명이 화장실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뿌린 마취제를 맡고서 순간 정신을 잃게 되었고, 괴한들은 담요같은 것으로 뒤집어씌우더니 몽둥이로 무차별 두둘겨 패고 발로 밟더라는 것입니다. 홍교수님은 머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손으로 머리를 감싸 숙이고서 몸을 옹크린채 무수히 어깨며 등을 맞았다고 합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그들은 발로 밟고, 몽둥이로 두둘겨 팼으며 이때 홍교수님은 오로지 맘속으로 상제님을 찾으며 태을주만 읽으셨다고 합니다. 물론 테러를 가한 사람들이 누군지는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홍교수님은 이 사건이후 자책하시기를, 내가 학자의 입장에서 너무 고지식하게 사실 그대로 책을 썼구나 하고 생각하셨고, 내가 수양이 부족해서 이런 일을 당하는구나 생각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다음 월간 천지공사를 함께 발행하던 편집기자 젊은 P씨가 형제교단 탐방이라고 해서 모 교단을 방문했던 일입니다. 저도 이때 함께 월간 천지공사 발행에 관여 했으므로 아주 소상하게 아는 일입니다. 홍교수님과 저는 P군에게 기자협회에서 기자증이라도 발급받아서 가면 한결 낫지 않겠느냐고 했는데 P군은 형제교단을 취재하러 가는데 별일이 있겠느냐며 그냥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약속한 시간이 지나도 P군은 돌아오지 않다가 1주일이 되어서야 돌아왔습니다. 옷을 벗겨보니 맞은 자국으로 온 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습니다. 당시 P군에게 일주일동안 있었던 일을 쓰게 해서 두 부를 작성하여 한부를 제가 직접 읽어보았습니다. P군은 형제교단 취재를 나왔다고 하니까, 형제교단 좋아하네~ 하면서 감금해서 패고 짓밟고 무수한 테러를 가했다고 합니다. 일주일간 시달리다가 마지막 날에 봉고차에 태워서 산으로 데려갔는데 이미 구덩이를 파 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여기에 도장을 찍어라. 만일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도장을 찍지 않는다면 구덩이에 묻어버리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종이에 적힌 내용인즉 홍교수는 나쁜 놈이며 이제부터 홍교수와 결별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P군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도장을 찍지 않으면 어느 산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생매장을 당하게 될 참이었습니다. 결국 P군은 거기에 굴복하고 살아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P군은 고소하는 것을 포기하였고, 그 일의 충격이 너무 컸던지 결국 신앙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뒤 P군을 다시 본 것은 홍교수님이 돌아가시는 일로 인해 천안에 빈소를 마련했을 때입니다. 그 때 다시 찾아온 P군을 본 것이 전부입니다.
2001년 10월 25일 홍교수님과 사모님이 괴한에게 살해되시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유족 중에 한분이 제게 전화를 해서 받았는데, 말하기를 홍교수님이 아무리 전화를 해도 안 받는 걸 보니 아마도 집에 안계시고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걱정은 되었지만 별일 없으려니 했습니다. 혹시 납치를 당했어도 그저 겁을 주는 정도겠지 생각이 들었을 뿐 설마 사람을 죽이겠는가 싶었습니다. 유족 중 한분이 저녁 무렵 집을 가보니 방문은 열려있고, 교수님 부부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외지에 나가있는 자식들이 소식을 듣고 속속 달려 왔습니다. 집안 이곳 저곳을 아무리 찾아봐도 집에는 안계셨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과 함께 온 운전기사 한분이 화장실 옆에 있는 조그만 창고를 열어보았습니다. 그 작은 창고는 월간 천지공사 과월호 등을 넣어 두는 곳이었습니다. 아무도 거기를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 기사분이 뭔가 짚이는 것이 있어서 열어본 것이지요. 너무도 충격이었습니다. 홍교수님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그 위에 사모님이 포개져 놓여 있었는데 이미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와 바닥이 온통 피로 물들어있었고, 사모님의 몸속에 있었던 모든 피가 다 흘러내린 뒤였습니다. 그 처참한 장면을 눈으로 본 유족들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나중에 범임을 잡아서 현장검증을 할 때 저도 알게 된 것입니다. 12년 전 당시 수사하던 형사들의 얘기가 딱 맞았습니다. 형사들이 말하기를 이 범행은 절대로 한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최소 두 명에서 세 명이 한 것이라는 거였습니다. 홍교수님은 대문 쪽으로 한사람을 배웅하러 나갔는데, 갑자기 괴한들이 들어와서 홍교수님을 양쪽에서 잡고는 살해했던 것입니다. 다음날은 서울 단군학회에 참석하기로 하고 홍교수님과 사모님이 올라가는 아침 8시 10분 차표를 끊어놓았었다고 합니다. 사모님은 미장원서 머리를 하고 집에 돌아와서 젊은 사람들이 홍교수님께 도를 배우러 왔구나 하고 생각하고 부엌에서 찬 국에 밥을 말아 드시고 있었는데, 소리가 나서 나가게 되었고, 사모님을 발견한 괴한이 보도블록으로 머리를.....그리고 창고에 시신을 유기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유족들은 너무도 충격이 컸습니다.
문) 선생님은 사건이 발생한 당시에 모 교단 소속 사람들이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않았는지요?
답) 다른 사람들은 혹 몰라도 우리 교인들은 절대로 모 교단 소속 사람들이 그러한 살인을 저질렀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홍교수님과 저는 증산교 내에 복잡한 소송 건으로 아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입니다. ○○○이라는 사람이 들어와 교단을 장악하고 홍교수님과 저를 몰아내려고 갖은 못된 짓을 하고, 그 일로 인해서 79건의 소송이 진행되고 있을 때입니다. 그 ○○○이라는 사람이 제게 당시 말했던 얘기를 기억합니다. 중국 교포에게 천만원만 주면 사람 죽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고, 사람 죽이고 다음날 비행기타고 가버리면 아무도 모른다는 그런 협박성 얘기를 들은적이 있어서, 저는 그 놈이 저지른 것이 아닌가 생각했을 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상제님을 신앙하는 형제 교단 사람들이 그러한 일을 저지를 거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는 그토록 순진한 사람들입니다.
당시 수사가 진행될 때, 그토록 믿었던 K군이 모 교단에서 보낸 사람인걸 알고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고, 우리가 너무도 순진했구나 하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K군이 예산을 찾아와 홍교수님에 접근했을 때, 홍교수님은 너무도 그 사람을 믿었습니다. 아니 홍교수님 뿐이겠습니까? 저도 그 청년을 좋게 보았고, 하나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전문대를 나온 K군을 모 대학에 편입시켜주고 학비도 다 되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K군은 증산교 본부에 가서 장사모님과도 대화를 했으며, 해방이후 전개된 모든 교사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었고 그는 이를 녹음했습니다. 당시 전혀 그러한 것들이 모 교단으로 흘러 들어갈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K군은 키도 크고 점잖은 사람이어서 다 믿었던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증산교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없습니다. K 군과 같은 젊은 사람이 들어오니까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홍교수님은 수제자 키우듯이 많은 애정을 쏟으셨고, 정성을 들이셨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수사가 진행되면서 K군의 핸드폰이 모교단과 통화한 수백건의 내용이 나오면서 너무도 놀랐고,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문) 청음 이상호 선생(대종사)과 남주 이정립 선생(종사)이 돌아가신 이후 증산교는 교단의 대표인 종령을 선출직으로 전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배경은 무엇이고, 종령을 3번 역임하신 홍교수님과 남주 선생과의 관계를 알고 싶습니다.
교단의 대표인 종령을 선출식으로 바꾼 것은 남주 선생의 유명에 따른 것입니다. 남주 선생선화 후에 김형관이라는 분을 그 처음으로 해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직선제였다가 지금은 간선제로 바꾸었습니다. 그것은 한 지역에서 신도수가 많다고 해서 교단의 대표가 되면 문제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종령이 되려면 신앙연수가 30년은 넘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증산교는 많은 파동을 겪었습니다. 특히 ○○○라는 사람으로 인하여 여러 해동안 많은 고통을 당하였는데 그가 가장 내몰려고 했던 사람이 홍교수님과 저입니다.
홍교수님은 증산교도 기독교나 불교, 천주교처럼 대한민국 사람들 누구나가 자연스럽게 믿는 그런 종교를 만드시려고 생각하셨고 어떻게 하면 이를 이룰수 있을까 한평생 고민하시고 애쓰셨습니다. 홍교수님은 대한민국 어느 신흥종교 교단, 수운교가 됐든 단군교가 됐든 어디를 가시든 환영받는 분이셨습니다. 한분 상제님을 신앙하는데 너와 네가 어딧냐 하는 마음이셨고, 다 홍교수님을 좋아했습니다. 물론 사람이라면 사소한 흠이 없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장점을 취해야 하고, 그 행동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인 가운데 일부 사람들이 홍교수님을 보고는 지가 대학 교수면 교수지 뭐냐? 하고 시기 질투하시는 분이 간혹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홍교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생활한 것으로 볼 때, 상제님 진리를 위해서 너무도 애쓰시고, 사심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돌아가신 남주 이정립 선생에게는 홍교수님이 수제자 같은 분이셨습니다. 남주 선생께서는 홍교수님이 어릴 때부터 너무도 귀여워 해주시고 아끼셨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방학이 되면 홍교수는 증산교에 와서 남주 선생과 한 방에 앉아 궁금한 것을 묻고 답하는 거의 유일한 신도였으니까요. 홍교수님은 남주 선생을 절대적으로 받들었고, 수학교수답게 꼼꼼해서 하나하나 다 메모하고 적고, 기록하였습니다. 과연 신도 가운데 누가 그렇게 까지 하겠습니까? 남주 선생에게는 홍교수가 수제자격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우리 같이 무식한 사람이야 그저 지나가는 식으로 한 두번 교화얘기를 듣는 정도지만 홍교수는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 이외에도 많은 말씀을 듣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못다 한 얘기는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면서 이상으로 오늘 예산 다녀온 내용을 참신앙 회원 여러분과 함께 나누는 바입니다.
(사진설명) 잡풀만 우겨져 있는 홍교수님 집터, 교수님의 자호가 범초입니다. 평범한 풀이라는 의미입니다. 너무도 소탈하고 서민적이고 자신을 한없이 낮추었던 분이셨음을 생각해 봅니다. 증산교를 기독교나 불교 천주교처럼 온 국민이 믿는 종교를 만들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셨다고합니다.
(사진설명) 홍교수님 집터. 이곳에 꼭 홍교수님 순교비와 추모비를 세우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홍교수님과 사모님께서 돌아가신 이곳은 상제님을 신앙하는 우리 모든 참일꾼들에게는 반드시 참배해야 할 예산 성지라고 생각합니다. 참일꾼들로 하여금 난법의 거짓을 깨닫고 상제님 진리의 참을 찾도록 이끌어주신 분이 바로 홍범초 선생이십니다. 이곳에 기념관도 세우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생각일뿐입니다. 많은 참신앙 일꾼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참이 반드시 승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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