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전-이근직 실장과의 만남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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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나무 작성일13-12-12 21:41 조회7,129회 댓글0건본문
[90년대 후반에 처음 만남]
고(故) 이근직 행정실장님은 56년 병신생이니 나이 차이가 5살 위이신 형님뻘 입니다. 제가 98년 대전으로 발령받아 내려오면서 처음 뵙게 되었는데, 이미 그 분은 저보다 일찌감치 대전에 와서 정착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제 친형님과 술자리도 자주하는, 친분이 있는 사이였기에, 저와의 만남이 부자연스럽거나 어렵지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근직 실장님과는 98년부터 자살로 생을 마감하시던 2002년까지 5년을 서로 알고 지냈습니다. 제가 술을 잘하거나 사람들과 적극적인 교분을 맺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가깝게 간담상조하는 만남을 한 번도 못해 봤습니다. 하지만 그분과 특별한 일로 인연을 맺었는데, 그것은 돌아가신 홍범초 교수님과도 연관되는 일이었습니다.
90년대 후반 당시 도문 분위기는 인묘진 사오미라는 시간대를 배경으로 개벽에의 열망이 서서히 달아오르던 때였고, 한편으로 홍범초 교수님에 대한 적개심이 은연중 확산되던 때였습니다. 물론 그 적개심의 근원에는 두 분의 설교말씀이 큰 비중을 차지했었던 게 사실입니다. 지금도 보관하고 있는 노트와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쓰여 있는 것을 확인합니다.
“자 이상호가 죽었고 이정립이 죽었으면 그것을 끝이고 말면 좋은디 지금 판이 딴 판이고 그런디 이 홍성렬이가 이게 증산 무슨 범증산교사? 거기다가 그게 다 뭐하는 소리냔 말여. 그거 가지고도 안되서 무슨 월간 천지공사가 어떻고 뭘 어쩌고.....어째 하필이면 홍성렬이란 놈이 내게서 붙어나간 놈인데 제게다 도 전한 거밖에 없는디. 어째 하필이면 여기와서 까부냐 이말이여, 까불다 맞을수 있지. 홍성렬이가 그게 직계, 내 직계인디 어째서 이 지구상에 고놈들이 꼭 그렇게 괴롭히냔 말여 허니까 하도 미우니까 정의의 천사들이 여기 있는 이들이 다 정의의 천사들이거든. 야 이 나쁜놈아 한 대 맞아라. 맞았으면 그것으로써 개과천선해야 하는디.
그러니까 이제 글 쓴다고 뜯어대거든, 홍성렬이란 어린 놈이 어린 ○○가. 쉽게 말하면 대가리에 피도 안마른 ○○가, 다시 얘기해서 쇠똥도 안떨어진 ○○가, 지가 나 일할 때 자기 봤냔 말여. 어떻게 했는지. 내가 한 행동까지 나열하고. 이정립이 이상호하고 나하고 맺어진 것 알아? 제놈 가정 포교한걸 알어? 그 ○○가 부지하처소종래지 지가 어떻게 해서 교 받은 것도 모르는 ○○여. 그 ○○가. 이거 기가 막힐 노릇이거든.“
물론 이 말씀은 홍교수님 돌아가시기 이전의 것들입니다.
[이근직 행정실장과 인연 맺은 이야기]
98년에 대전에 내려온 저는 연구부에 소속되었습니다. 훗날 그 부서는 문화소식지와 개벽지를 발간하는 세종기획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저는 글쓰기와 강의가 주 업무 분야였습니다. 당시 한참 몰두하던 작업은 대순진리회의 비극이란 책자와 8관법 기본교리 책자 작업이었습니다.
당시 99년에 사상연구소 가 문을 열게 되었는데, 이근직 실장님은 연구소 개소 작업의 실무라는 중책(행정실장)을 맡아 일을 처리하고 계셨습니다. 당시 50여명 정도의 박사급 인재들을 뽑아서 새로운 인문계 연구소를 만드는 실무를 맡았기에, 상당히 바쁜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근직 실장님은 어느 날 저를 찾아왔습니다. 전에도 몇 가지 일로 인연이 있었는데, 찾아온 용건은 논문 대필 작업이었습니다. 이 실장님도 박사학위 소지자셨는데, 초기 연구소 문을 열면서 각종 살림살이에 전념하다보니, 정작 본인의 연구논문을 차분히 앉아서 쓰기가 어려웠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도문의 주된 관심사 가운데 하나가 소위 교단에 도전해 오는 난법의 척결이었기에, 이에 대한 나름의 역할을 하시려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실장님은 글로써 난법 척결에 앞장서시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각종 일 때문에 조용히 연구에만 몰두하면서 글을 쓸 시간이 마땅치 않았기에 친분이 있는 저를 찾아왔던 것입니다. 글은 제가 써주고 작품은 둘 혹은 실장님 이름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이 실장님은 자료 제공의 편의와 함께 수고비를 충분히 주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당연히 긍정하였습니다. 글의 분야는 해방이후 김제 용화동 증산교를 배경으로 한 당시의 포교와 조직 실상을 정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해방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일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이 실장님과 단둘이 모 식당에서 만나 식사를 몇 차례 하였고, 약속한 수고비도 받았습니다. 당시 어린 저는 마음이 기뻤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아는 인맥을 동원하여 나름대로 자료를 모았고, 특히 답사팀을 통해 자료를 수집하면서 글을 썼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글로써 발표는 되지 않았습니다. 중간 보고는 되었지만 내용 부실로 보류되었고, 차일피일 작업이 미뤄지면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와중에 이 실장님은 월간지에 실을 글을 써 가지고 왔고, 그 내용을 제가 다시 가다듬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용봉(龍鳳)이 바로 두 분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글이었고, 홍범초 교수님의 형님이신 홍○○이라는 분이, 교단 교주님이 젊은 시절 포교한 연맥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실장님이 원고를 가지고 제가 있던 사무실로 오시던 날, 이실장님 뿐만 아니라 교단의 젊으신 그 분도 함께 왔었던 걸 기억합니다. 월간지는 얼마 뒤 발간되었고, 내용은 도문 안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이 일은 홍교수님 피살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의 일인데, 이미 조짐은 시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저는 아직 마흔 살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였습니다. 조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볼 수는 있었지만, 사안 사안 작은 일들을 결정하거나 처리할 수 있는 직위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분위기가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대강은 짐작했습니다. 뭔가 사단이 나기는 날 것 같았습니다. 개벽은 임박하는 것 같았고, 교단에서 주장하는 정의는 승리하는 것 같았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대교육이 끝날 때면 사람들은 큰 기대감과 정의감으로 도취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홍교수님에 대한 적개심을 불어넣는 그 분 들의 강의가 있었던 날은 사람들의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볼 수 있었으니까요.
1998년, 교수들의 학술단체 증산사상연구회를 창립하여 이끌어오던 배용덕 회장이 타계하고, 그 뒤를 이어 부회장이었던 홍범초 교수님이 연구회를 이끌 인물로 부각되고 있었습니다. 아울러 증산교 연구에 큰 역할을 하고 있던 김탁 교수 등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긴밀하게 연락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중심에 홍교수님이 계셨다고 보여지며, 당연히 반대쪽에서는 긴장감과 함께 눈에 가시처럼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한 와중에도 2001년 3월경 홍교수님을 뵈러 예산으로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이미 홍교수님과는 10년 전부터 인간관계가 있었던 터라 뵈러 가는 게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혹시 교단에서 심어놓은 사람이 있으면 어쩌나 하고 긴장하였지만, 미리 전화통화를 통해 그런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 이후 홍교수님에 대한 적개심을 행동으로 옮길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 사람들은 이근직 행정실장과 접촉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2001년 10월 25일 모교단 신도 3명에 의하여 홍교수님 뿐만 아니라 사모님마저 피살당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10월 27일 아침에 출장을 가는 길에 대전역에서 이근직 실장을 만나, 함께 경상도 쪽으로 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로 함께 가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만나자 마자 당연히 화제는 피살사건이었고, 저는 몇 마디 넘겨 물으며 대화를 유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태도를 보며 모 교단에서 살인을 저질렀구나 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이 실장님은 사건의 낌새를 알아차리는 나를 확인하고는 상당히 당황하였고, 출장 내내 나를 안심 시키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근직 행정실장이 얼마만큼 그 사건에 깊이 관여했는지는 세세하게 알 수는 없었습니다.
[더이상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합니다]
해가 바뀌면서 2002년 임오년이 되었습니다. 국내에서는 안면도 국제꽃박람회가 처음으로 열렸고, 2002 한일 월드컵의 열기가 엄청나게 끓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도문에서는 풍류주세백년진이 화두가 되던 때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근직 실장님의 돌연한 자살 소식을 듣게 됩니다. 장례식날 시신이 안치되어있는 을지병원으로 갔습니다. 이미 많은 성도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저 먼 발치서 바라만 보았습니다. 왜 실장님이 자살을? 왜? 당연히 그 때의 안목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을 저는 모릅니다. 몇 가지 일로 인해 인연을 맺었지만, 함께 술자리를 같이하며 인간적인 고뇌와 고민을 함께 했던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나이가 47살의 한창 때입니다. 자살도 종류문제겠지만, 도저히 해답이 보이지 않을 때 선택하는 인생의 마지막 카드가 자살이 아닐까 합니다. 한 개인이 자살로써 스스로 삶을 접는다는 것은 아마도 수없는 고뇌와 번민의 과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그분이 생을 마치기 불과 2~3개월전 함께 아침 조례에 참석했을 때의 기억입니다. 바로 옆자리에 앉았는데, 넋 나간 사람 모양 멍한 상태였습니다. 평소에는 잘 웃고, 밝고 생기가 넘치던 분이셨는데, 풀이 팍 죽어 있었습니다. 조례를 마치고 다른 성도에게 실장님의 근황을 물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느냐고. 그러자 연구소 행정실장 직에서 얼마 전에 해직되어 조직 내 위상이 불안정한 상태라는 것이었습니다.
한창때의 실장님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긴급하게 두 분의 가족 문제로 돈을 급하게 쓸 일이 있으면 일단 재무부에서 갖다가 쓰고, 후 보고를 해도 좋다는 허락을 맡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신임을 받고 있다는 소리입니다. 비록 연구소 행정실장이라는 자리지만 일주일이면 3~4일 보고를 들어가는 중책이었고 측근이었습니다. 실장님은 각종 경찰서에 관련한 일들을 주로 담당 하였습니다.
2005년 나는 신도로서는 최고 보직에 있었는데, 조직에 대한 충성심으로 열정을 불태우던 시절입니다. 강의와 말씀 받들기가 주 과제였지만 몇 가지 소위 난법 사건 해결의 중심에는 제가 있었습니다. 겁박, 유인, 회유, 성추문 잠재우기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시 하루하루가 약소한 체력에 과중한 업무로 힘든 때였습니다. 아마도 천지는 그러한 과정을 겪도록 했다고 생각합니다. 2005년 여름인가 아련히 잊고 있던 홍교수님 살해사건의 범인 한명이 누군지 포착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모 교단 모 신도는 죄의식에 그만 술자리만 있으면 자신이 죽였다고 떠들곤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2010년 4월 드디어 경찰은 사건이 일어난 지 9년 만에 범인 3명을 잡았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궁극의 살인 지시자로 이근직 실장님을 지목 발표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행정실장님은 2002년에 자살로써 생을 마감했던 것입니다. 더 이상 사건 수사는 확대되지 않고 종결되었습니다. 최종 지시자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이미 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더 윗선의 지시자는 없었던 것일까요?
1998~2002년 까지의 시간대에는 이근직 행정실장님이 가장 측근 중에 한명 이었습니다. 2004~2008년에는 제가 가장 측근 중에 한사람 이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생각합니다. 그 분이 왜 자살로써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는가 생각해 봅니다. 물론 풀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홍범초 교수님은 한평생 상제님 진리의 참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 하신 분입니다. 언제나 주말이면, 혹 쉬는 날이 있으면 카메라와 녹음기를 들고 각 교단을 일일이 찾아다니시며 100년 상제님 진리의 자취를 수집하셨습니다. 홍교수님의 마음속에는 상제님 진리에 대한 열정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근직 실장님도 진리를 찾고 참을 찾고자 고뇌하는 영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것이 잘못된 생각을 가지신 분들에 의해 주입된 그릇된 신념이었지만 그것에 따라 사셨고, 결국 수많은 고뇌와 번민 끝에 자살로써 참회의 길을 선택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근직 실장님을 비난할 자격이 조금도 없는 사람입니다. 당시 도문의 분위기에 누구라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영향을 받았으니까요.
묘하게도 저는 두 분의 책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홍교수님의 범증산교사와 증산교개설 그리고 이근직 실장님이 당시 논문 작업을 의뢰하면서 주었던 상제님 진리 관련 책자 몇 권입니다. 더 이상 자신은 이 책들을 볼 시간이 없다면서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 번 이사를 하면서 다른 책들은 정리했지만 두 분의 책만큼은 꼭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근직 실장님은 경북 봉화출신입니다. 홀어머니 밑에서 외아들로 어렵게 자라신 분입니다. 가끔씩 그분이 주었던 책을 펼쳐보며 이 기막힌 운명적인 만남을 생각해 봅니다.
삼가 홍범초 교수님 부부와 이근직 실장님의 명복을 빕니다
댓글목록
복록신님의 댓글
복록신 13-09-30 18:08 댓글상단유구무언 입니다
어떤글을 달아야 할지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다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없기를 바랄뿐 입니다
사필귀정님의 댓글
사필귀정 13-09-30 19:13 댓글상단사필귀정 (事必歸正)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길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저는 상제님 대도가 사필귀정이 될 것을 믿습니다. 분명히 상제님은
난법을 지은뒤에 참법을 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참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달리말하면 사필귀정일 것입니다. 물론 저절로 나오지는 않겠지요.
모든건 신명이 하고 그리고 사람이 역사의 작품으로 만들거라고 봅니다.
참신앙이 그러한 사명을 나름대로 맡았다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참신앙은 초지일관 참을 추구해 주실것을 부탁드립니다.
혹시 돌아가신 이근직 실장님 이름을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아시나요?
후우움님의 댓글
후우움 13-09-30 20:21 댓글상단to 사필귀정 ↑ 예지자님의글 댓글에 사필귀정님 말씀이 생각나서 한줄남겨봅니다.
한사람이 축생이었더라면 꼼짝없이 진술축미..
완벽한 난법이 될뻔하셨다는 댓글을보고 우스운얘기가 생각이 나더군요.
몇해전 제가있던도장에서 본부로 발령이나서 본부생활을 하시던중 병가인지
휴가인지는 모르지만 저의도장에 오셔서 식사시간쯤에 잼난말씀을 하시더라구요~
지금은 돌아가신사람인데 그사람이 술생인데 식사를하고는 늘 다시 되새김질을 한다는거예요~
자기가 소체? 하여튼 소와 아주연관이 많다는것을 강조함인지~~
소가 여물을 다먹고 다시 끌어올려 되새김질을 하자나요.^^
그행동을 그대로 한다면서.. 아마도 그얘기를 그사람에게 직접들었겠지요~
그러니깐 그사람말을 인용하면서 말씀했겠지요..
그분도 그말씀을 옮기면서 본인도 웃기지도않은지 웃더라구요..
저는 그말씀을듣고 한심해서 웃었던기억이 납니다.^^ 젠장~
후우움님의 댓글
후우움 13-09-30 20:34 댓글상단참..
제가보기에는 행정실장께서 살인사건이 터지고 "토사구팽" 당하시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그 모든책임을 그실장에게 다 넘겨야했겠지요~
사건이 빨리 단서가<그당시증언할사람등..> 나와서 아직까지도 요상한소리로 혹세무민하는것을 막아야할텐데요~~
썩어문드러질 거짓자리종자들같으니라고..-.-
사오미해탈님의 댓글
사오미해탈 13-09-30 21:19 댓글상단to 후우움 ↑ 토사구팽 (兎死狗烹) 이란 토끼가 죽으면 토끼를 잡던 사냥개도 필요 없게 되어 주인에게 삶아 먹히게 된다는 뜻으로, 필요할 때는 쓰고 필요 없을 때는 야박하게 버리는 경우를 이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토사구팽은 선천 조직학에서 아주 공식과도 같은 말입니다. 상제님 말씀을 잘 분석해보면 훗날 교단 교주중에는 토사구팽하는 교주가 나온다는 암시가 있습니다. 물론 아주 몰인정한 난법 교주에 해당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 한신(韓信)이, 한 고조(漢高祖)가 자기 밥을 밀어 주어 먹이고(推食食之) 자기 옷을 벗어 입혀 준(脫衣衣之) 은혜에 감격하여 괴통(?通)의 말을 듣지 않았나니 한신이 한 고조를 저버린 것이 아니요, 한 고조가 한신을 저버렸느니라.
한신이 한고조를 저버린 것이 아니요, 한고조가 한신을 저버렸다는 말씀이 바로 토사구팽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상제님은 일꾼에게 경고하시기를 너희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앞으로 교주가운데 일꾼 실컷 부려먹고 저렇게 토사구팽시키는 놈이 있느니라 이런 말씀이신것 같아요.
저도 참신앙 홈에 들어와서 많이 배웁니다.
신바람님의 댓글
신바람 13-09-30 22:27 댓글상단며칠 전 집안 제사로 대전에 내려갔었는데 형수님께서 뜬금 없이 사촌 오빠 이근직 실장님에 관련된 일을 이것저것 물으시더군요...
오래된 일인데 갑자기 왜 물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원체 소상히 아는 바가 없어 참신앙에서 본 글과 밝혀진 부분만 적당히 답해드렸네요..
당시에 무척 슬퍼하시던 기억도 나고 뭐라 드릴 말씀이 없더라구요.. 정말 이런 일이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후우움님의 댓글
후우움 13-09-30 22:30 댓글상단to 사오미해탈 ↑ 아..
늘 제가 궁굼해하던 성구중에 하나입니다.
과연 저 성구는 무슨내용일까.. 생각했었는데 해탈님께서 깨우침을 주셨군요~
지금현재 도판사람들의 모습모습들을 그대로 보여주는듯합니다.
감사합니다.^^
흑운명월님의 댓글
흑운명월 13-09-30 22:48 댓글상단고 이근직 실장님과 술한잔 하던 생각이 나는군요.
정말 좋으신 분이었습니다. 서글서글하고 늘 자신감을 갖고 사셨죠.
이곳에 들어와서 실장님에 대한 글을 읽게 되는군요.
그분은 희생양이셨습니다. 저는 압니다.
실컷 이용만 당하고 결국 죽음의 길을 가셨죠.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돌아가시기 육개월 전인가 행정실장직에서 해임되고
어느날 저와 만나서 소주를 함께 했습니다.
매사에 자신감 넘치고 활기있던 분이었는데
좌절감인지 배신감인지 허탈감인지 너무도 쓸쓸해 보이셨습니다.
저는 2004년 까지 거기에 있다가 나왔습니다.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그저 빚갚는 일로 몇년을 보냈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그저 세월을 보냈습니다.
지금도 결혼 못하고 혼자 삽니다. 지금은 그게 편합니다.
행정실장님의 명복을 빌 뿐입니다.
묘소가 어딘지 알면 한번 찾아가 보리라 늘 생각했지만
제 코가 석자나 빠졌는지라 차일피일 미루다 세월 보냈습니다.
참신앙이 잘되길 빕니다.
예지자님의 댓글
예지자 13-10-01 00:01 댓글상단도전(道典)발간은 같은 음사로 보면,도전(道戰)이 되어 버렸네요!고수부님 재세시에도 도전이 있었고,현 모 교단에서도 있었습니다.신비전님이 경험한 홍범초님의 인연과 일화가 오늘의 참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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