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보천교 십일전이 조계사 대웅전 건립에 쓰인 사연
페이지 정보
작성자 아스피린 작성일16-04-20 18:40 조회14,213회 댓글2건본문
증산교의 교조 강일순은 제자인 차경석에게 예언같은 말을 하였다.
,너는 집을 크게 짓지마라.그러면 네가 죽게 된다.,운명을 거스리듯 차경석은 1925년 1월부터 보천교의 중심 궁전인 십일전을 짓기 시작했다.진사년에 성인이 출현한다는 정감록의 예언에 따라 새로 지은 궁전에서 천자로 등극할 계획이었다.1919년 당시 보천교의 간부진만 해도 557.500명 이었다고 하니 교세를 짐작할수 있다.
정읍에 세워진 십일전은 당시 조선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1만여평의 부지에 보천교의 성전인 궁궐을 짓고 정전인 십일전은 근정전의 두배나 크고 하려하였다.목재는 백두산 근처에서 베어왔고 조선 팔도의 석재를 모아왔다.십일은 흙토자.를 파자한 것이니 이 땅의 주인이 머문다는 뜻이다.
5년간의 역사끝에 십일전 성전이 장엄하고 화려한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었다.일제는 십일전 건축이 완성되자 순사들을 출동시켜 출입을 봉쇄시켰다.보천교와 관련된 인사는 수시로 체포하였다.보천교의 자금흐름과 독립단체 지원을 문제삼았다.
관제언론은 보천교를 믿는 민중을 시대에 뒤떨어진 무지한 민중으로 몰아갔고 사교집단으로 매도했다.일제의 이간책은 결국 성공했다.핵심인원을 매수하여 내분을 일으키게 하였다.한편으로는 차경석에대한 암살도 시도 되었다.
근대 우리 독재정권들이 독립투사들과 민주인사들을 탄압하고 반대세력을 무력화 시키는 방법은 일제에게 배운것이다.
보천교 교주이며 새시대의 천자를 꿈꾸었던 차경석은 공들여 지은 십일전에 들어가 보지도 못한채 홧병으로 죽는다.1936년 3월 10일 57세이다.차경석의 아들은 빨치산 토벌대장으로 유명한 차일혁 총경이며 손자는 구명시식으로 유명한 차길진 법사이다.그는 할아버지 차경석의 영혼을 몸주로 모신다고 하였다.
일제는 보천교 재산처리위원회라는 유령단체를 만들어 재산 포기각서를 받아 낸뒤에 십일전에 대한 경매에 들어갔다.어느 누구도 경매에 응하지 않아 경매가는 500원에 낙찰되었다.그당시 십일전 건축비용은 150만원이 들어갔다.이렇게 경매로 넘어간 보천교 십일전이 제 삼자를 통하여 불교계로 들어 오니 이때가 1937년이었다.
불교계는 1937년 3월 십일전 건물을 답사하고 경매 낙찰자 에도 초오지로오 와의 매입계약을 체결하여 대금으로 12000원을 지불하였다.십일전 건물은 오백원에 경매됐다가 불교계에서 12000원에 다시 매입한 것이다.
이어 두 달간 건물 해체공사를 마친 후에 정읍에서 서울로 운반하였다.1938년 7월 27일에 기공하여 그해 10월 12일에 상량식을 올리고 11월 26일 해체이전공사를 완료하였다.
그리고 1938년 10월 25일 대웅전 낙성 봉불식을 거행하였다.
대한불교 조계종 총본산 조계사 대웅전은 이같은 역사를 품고 있다.조계사 문살장엄조각이나 단청을 보면 일반사찰하고는 다른것도 그 때문이다.
조계사를 참배할때는 우리 근대 역사도 함께 보시기를.‥
사진 1번은 보천교의 십일전을 해체하여 조계사 대웅전을 세우는 모습이다.
사진2번은 정읍에 있던 십일전 건물이다.
사진3번은 현재의 조계사 대웅전이다.
사진 4번은 정읍에 건설된 보천교 본원 건물이다.
사진 5번은 보천교 차경석 교주 생전 모습이다.
댓글목록
여기까지왔는데님의 댓글
여기까지왔는데 작성일
구명시식으로 잘 나가던 차길진법사도 미국 한인사회에 성추문이 터졌었죠...
명성을 얻기도 힘들겠지만 재물과 여자는 더 넘기 어려는 더 어려운가 봅니다...
초심지키기가 죽기보다 어려운가 합니다...
오색채운님의 댓글
오색채운 작성일
■증산 신앙사[교단,주요인물]의 재평가 작업
■가칭 [범증산통사]의 발간 작업의 필요성
■일은 단체명으로 하는 것이 객관적이고,효율적이며 공적재산이 될수 있다.
*신앙사에 있어서 진귀한 사진 자료군요
■증산 신앙사[교단,주요인물]의 재평가 작업
*차경석성도께서는
십일전이 준공된뒤 들어가보지 못하고
보천교 교도들이 헌성한 돈으로 완공된 십일전이
일제에 의해 허망하게 철거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네여.
*기사에서 보이는 보천교의 분열과 패망
*차경석성도의 사망에 대한것..
*정황상 일제에 의해 기획된 것은 같은 느낌을 많이 받네요
-시간이 많이 지났고,일제 치하에 언론이란 쉽게 왜곡,변질될수도 있기 때문에
-역사적인 평가도 일정싯점에 가서는 다시 정립해야 할것 같습니다
■가칭 [범증산통사]의 발간 작업의 필요성
*한 신앙인의 집념과 순정으로 만들어진
[범증산교사] 같은 신앙사에 있어서 중요한 서적들이
현존하는 것도 가치있는 신앙사적 자료입니다.
좀더 생각의 영역을 확대한다면
향후에 증산법륜도가 올곧게 성장해서
국내외에 상제님 태모님의 신앙사 자료들을
세세하게 수집하고 검증해서
<범증산교 통사>라는 책을 발간했으면 합니다.
개인이 자료를 수집하고 발간하기엔 애로사항과
한계 상황이 많으니
뜻있는 단체가 주축이 돼서
상제님 신앙사의 자료들을
집대성했으면 합니다.
홍성렬교수님께서도
범증산교사2편의 발간 준비를 기획하시다가
뜻을 이루시지 못하시고
모종단 신도에 의해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증산신앙에 있어
증산 신앙사의 발자취를 정리하여
책으로 출간하는
가칭<범증산교 통사>라는 서적을 출간한다면
참 뜻 깊은 일이 아닐수 없을 것입니다.
현 증산법륜도 도생이 아닌
강00도생이 나중에 그러한
서적을 발간하고 싶다는 포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순수한 신앙의 목적이라면
천지에서 도와주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언제가는
그러한 책이 출간되리라
기도해 봅니다.
■일은 단체명으로 하는 것이 객관적이고,효율적이며 공적재산이 될수 있다.
증0도 혁명이란 취지로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많은 분들이 참여하고
또한 특정 개인이 열정적으로
●성물 개발
●동영상 제작
●진리강좌등을 했으나
*일이 틀어져 버리면
그동안 많은 분들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공적 재산인 그러한 것들이
개인 사유화 되버리는 일들이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향후에는 이러한 폐단이 없도록
신앙사적인 활동은 공동의로 하고
그 결과물은 개인이 아닌
후원한 공적 단체에 '
귀속이 되어
많은분들이 활용했으면 합니다.